불교탐구 - 제2부 삼보 - 4장 부처님 교설 - 삼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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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탐구 - 제2부 삼보 - 4장 부처님 교설 - 삼법인

마이템플 0 1857
2. 삼법인 (三法印)
 
  삼법인이라는 말은 불교와 이교도와의 교리적 차이를 단적으로 표시한 세 종류의 진리의 도장이라는 뜻으로, 부처님의 45년간 설법을 단 세 가지로 압축하여 표현하고 있어, 법인(法印)이라고 칭한다.
 
이것의 연유는 본래 부처님께서는 무명 내지는 무지가 인생고통의 가장 궁극적인 근원이라는 것인데, 사람들의 고통은 인생이 무지하고 무아하다는 무명의 이치를 모르는데 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내세워 인생무상을 증명해보이셨다. 이것을 처음에는 삼법인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이 보태져서 4법인이 되었다. 그런데 제법무아의 원리속에 일체개고가 포함되어있다고 판단하여 일체개고를 제외하고,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을 삼법인으로 정하게 되었다. 또한 5법인이라는 것도 있는데, 제법개공(諸法皆空)이 더해진 것이다.
 
삼법인은 모든 현상계를 정확하게 관찰한 것으로, 우리는 이를 통해 현재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가 어떠한 것인가를 확실히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이는 대승이나 소승을 막론하고 불교의 설법중에서 부동의 근본원칙이며, 불교사상의 근간을 구성하는 가장 주된 골격이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1) 제행무상 (諸行無常)
 
  행(行)이란 본래 옮겨 다니면서 바뀐다는 뜻으로, 불교에서 제행무상이란 모두 인연에 의해 생긴 세간의 일체 사물과 현상은 모두 변화무상해서 고요히 상주하거나 영원불변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연기설과 통합시켜 말한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일체의 것은 인연에 의해 존재하므로 상주 불변의 것이 없이 무상하다는 뜻이다. 행(行)은 시간적인 것이며 동적인 것인데, 움직이는 것 그 자체는 이미 소멸하고 있는 이치를 품고 있는 바, 영원한 것이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현재 드러나 있는 현상계 (감각하고 지각할 수 있도록 나타나는 세계)는 항상 변함없이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쉬지 않고 변해간다. 즉 모든 존재는 생겨나고 머무르고 변화하고 없어진다는 뜻인데, 이것은 감상적이나 체념적인 방향으로 변화해가는데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변화속에서 새롭게 바꾸어 소생되고 더욱 진취적이며 더욱 희망적인 모습으로 변해갈 수 있음을 알게 하는 가르침이다.
 
이렇게 행(行)하는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이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며 세상을 살아가는 교훈을 준다. 본래 존재의 바탕이 원래 무상한 것임을 알아 어떤 경우에도 한 곳에 집착하여 슬퍼하거나 고뇌 등으로 얽매일 것이 없음을 깨달으면 평안을 얻게 되는 것이다. 무상하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고, 가난한 이가 부자가 될 수 있고, 병든 이가 건강해질 수 있고, 무상하기 때문에 고통속에 있는 사람이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무상의 원리를 잘 알아서 항상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교만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변하는 것을 관찰하지 않는다면 도태되고 만다. 「금강경」에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武所住 而生基心)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응당히 마음을 주하지 말고 그 마음을 내라는 의미로 이는 항상 새롭게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한 곳에 고정시키고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은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나 다름없다. 단,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그것은 진리인데, 진리가 변하지 않는 것은 진리는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을 논할 수 있는 것을 초월한 때문이다.
 
 (2) 제법무아 (諸法無我)
 
  법(法)이란 사물, 물건, 존재를 의미한다. 제법이란 모든 사물과 각종 존재들을 가리킨다. 아(我)는 주재와 실체의 의미이며, 무아(無我)는 아(我)가 없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제법무아란 일체의 존재가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주재자가 없어서 모든 사물에 주재작용을 일으키는 내(我)가 없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세상에는 단일하고 독립적이며 자아존재적이고 자아결정적인 영원한 사물은 없으며, 모든 사물은 모두 연기에 의해 이루어진 상대적이며 임시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제행무상이 시간적인 변화를 강조한 것이라면 제법무아는 공간적인 차원의 것으로, 모든 것에 절대 나라고 하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며, 어떤 물질도 그 어떤 주체적인 존재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원래 없었는데, 인연따라 뭉쳤다가 흩어졌다가 하는 것이지, 어떤 근원적인 주체(我)가 있어서 그 주체에 의해 물질이 구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현실에 나타난 현상 자체가 없다고 부정하는 말은 아니고, 모든 사물이 인연에 따라 생겨나고 인연이 흩어지면 사라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시간이나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고정되어 변화하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며 인연의 영향을 받지도 않는 절대의 실체가 있지 않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 때문에 현실 자체의 부정이나 무시에 그 깊은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진실 자체를 그대로 뚜렷이 알아서 어떤 하나에 깊이 집착하지 않고 생멸에 대하여 담담하고 너그러워질 수 있게 되기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부처님의 무아사상을 대표하는 법이다. 무아법을 알면 인생을 지혜롭게 살 수 있게 된다. 인생의 여러 문제들은 원래 내가 있다는 허망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제법무아의 진리를 배웠으니 이제는 인생을 방관자적 입장이 되어서 객관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하며, 그리하여 삶을 사는 바른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인생이 무아라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무아라고 해도 내 몸은 여전히 육체적이며 생리적이다. 무아는 본래 나라는 주체가 생멸의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공한 것이기에 나를 세우지 말라는 것이지만, 몸이 필요한 것을 무시하고 바로 죽어라는 말은 아니다. 제법무아는 나의 본질이 무아임을 깨달아 마음에서 비롯되는 각종 번뇌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치는 진리의 법이다. 즉, 무심으로 모든 일을 행하라는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불교 이외에서는 인정할 수 없는 불교 독자적인 교리이다. 우리가 많은 들은 불경의 명구인 「반야심경」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에서 보다시피, 모든 물질의 속성은 공(空)이되, 현실은 물질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같다고 하셨으니, 이는 참으로 알아 듣기 힘든 진리이다.
 
 우리의 육안에 비춰지는 것만으로 판단하려고 하니 한계가 있는 것이다. 진리의 세계를 바로 알려면 혜안(慧眼)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공에도 물질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현실 위해서 모든 일을 하되, 마음은 비우라는 것, 즉 잘났다는 생각도 원망도 갖지 말고 삶에 충실하는 것
이 바로 제법무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삶일 것이다.
 
 (3) 열반적정 (涅槃寂定)
 
  열반적정은 앞의 두 법인과는 달리 긍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열반은 고요한 세계, 이상의 세계를 지칭하는 말로서, 니르바나라는 범어를 번역한 것인데 원래의 뜻은 ‘불어서 끄다, 불어서 꺼진 상태’라는 뜻이라 한다. 적정은 곧 열반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래서 열반적정이란 번뇌를 멀리하고 상(相)에 대한 얽매임을 끊으며 고요하게 항상 있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 살핀 제행무상, 제법무아와 연관시켜 총체적으로 열반적정에 대해 생각해보자. 일체의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사물은 모두 무상한 것이어서 중생은 염세의 고통을 일으키지만 다시 한걸음 나아가면 일체 사물은 무아여서 반드시 의지할 바가 없게 되고 그래서 멸에 이르게 된다. 이는 시간과 공간에서의 인연으로 이루어진 사물의 무상성과 무아성을 깨달은 후에 완전한 열반적정이라는 최고 이상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제법(諸法)은 무아(無我)요, 제행(諸行)은 무상(無常)이요, 일체(一切)는 고(苦)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 그저 깨닫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번뇌망상도 없어졌고, 또 바깥으로는 나를 동여매는 억압이나 속박도 없어진 상태, 바로 고요하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 열반적정이며 해탈이라는 것이다. 번뇌의 불꽃을 꺼버리니 그냥 고요하고 평화로운 것이다. 그래서 열반적정이다. 이때 고요하다는 것은 공(空)과 마찬가지이고 무(無)와도 비슷한 것이다.
 
이와 같이 열반적정은 불교의 최고 이상의 경지이며, 우주만물의 실상이라고 인식되고 있고, 나아가 우주만물의 진리로 간주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진리가 언어사유로 표상될 수 없는 그 어떤 내성에 의한 직관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통해 평화로운 열반의 세계가 이루어짐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몸소 행하여 보여주신 바처럼, 탐욕, 노여움, 어리석음에서 생겨나는 끊임없는 번뇌는 나를 태우는 불과 같아서 늘 고통을 가져다주는데 이것들은 한번에 불어서 다 꺼버리면 마치 고요함과 안락이 찾아들어 더없는 평화가 깃들고 적정한 속에 안주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열반적정이란 고요한 이상경계를 표현한 말이다. 그래서 진정한 열반은 죽음과도 같이 일체의 번뇌와 고뇌로부터 벗어나 고요함에 드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열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이 열반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열반이란 고요한 만물의 본질이며, 불교는 결국 마음의 고요함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사무량심(四無量心)과 사섭법(四攝法)
 
  육바라밀이나 십바라밀은 대승불교에 와서 더욱 중요시된 교리이지만, 사실 그 근원은 4무량심(無量心)이나 4섭법(攝法) 등에서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다. 특히 4섭법은 십바라밀에 그대로 포함되어 있다.
 
(1) 4무량심 (無量心)
 
  ① 자(慈) : 우애의 마음, 남에게 기쁨을 주는 것
  ② 비(悲) : 불쌍히 생각하는 마음, 타인의 고통을 제거해주는 것
  ③ 희(喜) : 기뻐하는 마음,  남이 낙(樂)을 얻는 것을 함께 즐거워하는 것
  ④ 사(捨) : 평안한 마음 고(苦), 낙(樂), 희(喜), 비(悲)를 초월하여 마음의 편안을 얻는 것
 
이 네가지는 선정(禪定)에 의하여 수습(修習)해야 하는 이타(利他)의 마음이다. 이것은 중생에게 무량한 복을 가져다주고 범천(梵天)의 세계에 태어나게 한다고 석존은 말씀하셨다.
 
 첫째, 우리는 자(慈)를 생각하면서 미륵보살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범어로 maitri(慈)와 미륵보살을 일컫는 Maitreya는 같은 어원의 말이다. 즉, 미륵이란 자(慈)가 가득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분은 잘하는 사람, 착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을 보호해주는 보살로서 지금은 도솔천에 계신다고 하나, 우리의 인자한 마음속에 존재한다고도 볼 수 있다.
 
둘째, 비(悲)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불쌍히 생각하고 그 고통을 없애주려는 마음인데, 여기서 우리는 대비(大悲)하신 관음보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고 고통에 빠져있다면 주저말고 대비관세음보살을 불러야 한다. 이 분은 잘못하는 사람을 야단치면서도 동시에 우리의 고통을 제거해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셋째, 희(喜)는 흰 치아가 나오도록 웃는 기쁨을 의미한다. 석굴암에 있는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의 상단이 있는 세 얼굴이 바로 백아상출상(白牙上出相)을 하고 있는 희(喜)의 모습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행복한 순간들뿐만 아니라 타인의 기쁨까지도 나눌 수 있는 희(喜)이다. 사실 우리는 이웃의 슬픈 일은 그래도 잘 감싸주지만, 이웃의 경사에는 진심으로 함께 기뻐하기가 쉽지 않다. 석존께서는 이 점을 간파하시고 잊지 않고 설하셨다. 그러므로 불자는 바른 희(喜)의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
 
 넷째, 사(捨)의 마음은 고통과 즐거움, 기쁨과 슬픔을 넘어서 마음의 평안을 얻는 마음이라고 한다. 이것은 반야(般若)의 경지에 다다른 마음이다.
 
 (2) 4섭법 (攝法)
 
  섭(攝)이라는 말은 포섭한다고 할때의 섭이다. 그래서 4섭법이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서로 대립과 마찰이 없이 하나가 되자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법으로, 모든 갈등을 포용하여 조화를 이루고 하나되게 하는 네가지 방법, 보시(布施)와 애어(愛語)와 이행(利行)과 동사(同事)를 가리킨다.
  이것은 중생을 구제할 때 갖는 기본태도인데, 그 순서도 중요해서 반드시 순서대로 해야 된다.
 
① 보시 (布施)
 
  사람들에게 인자한 마음으로 접하고 재물이나 진리를 기꺼이 베푸는 일을 뜻한다.
  「아함경」을 보면 석존도 보시에 관해서 설명하셨다. 그러나 사성제와 삼법인의 그늘에 가려 보시행이 무시되었다가 대승경전에 와서야 다시 강조 되었다.
 
보시(布施)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우리가 부처님의 전생을 봐도 잘 알 수 있다. 부처님이 전생에 닦은 공덕중에 제일 큰 공덕은 보시였다. 그래서 보시는 육바라밀에서도 맨 첫머리에 꼽힌다.
 
 ② 애어 (愛語)
 
  이것은 사람들에 대해서 항상 따뜻한 얼굴로 부드러운 말을 보내주는 일이다.
  좀 독특한 표현인데, 부드러운 말, 자애로운 말, 인자한 말 그리고 진실된 말이라는 뜻이다. 「금강경」에 보면 여래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요컨대 애어(愛語)란 진실을 말하고 타일러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③ 이행 (利行)
 
  이것은 항상 남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일을 행하는 것, 상대방에게 참된 이익을 주는 행위를 하라는 것이다. 이때 결코 생색을 내서는 안된다.
 
 ④ 동사 (同事)
 
  이것은 자타(自他)가 일심동체가 되어 같은 처지에서 일하라는 가르침이다.

  이 네가지는 그 의미가 12연기법이나 삼법인처럼 이해하기가 어렵지는 않다. 반면에 4무량심이나 4섭법은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개조에만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대인적(對人的)이면 상호관계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석존께서 우리 중생을 위해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정신으로 자신의 인생을 다 바치셨듯이, 우리도 4무량심과 4섭법의 마음자세를 갖도록 더욱더 말씀을 듣고 실천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부처님의 45년 동안의 설법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사는 모두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갈라지는 바, 부처님 평생의 설법은 마음의 주(主)가 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처님의 설법을 통하여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볼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모든 악은 짓지 말고, 모든 선은 행하며 그 마음을 스스로 깨끗이 하는 것이 곧 불교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어떤 절대적인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다. 다만 어리석고 어둠에 가려져 있는 진성(眞性)을 찾아내어 본래의 청정한 자기 마음을 되찾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불법을 구한다고 하는 것 역시 바른 마음을 지녀서 올바른 길을 찾아 수행하는 것이며, 나 자신이 이미 완전한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존재임을 알고, 현재에 이루어져 있는 나를 자꾸 의심해 들어가서 결국에는 깨달아 부처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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