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찰(고운사,월정사,금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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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찰(고운사,월정사,금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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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운산 고운사

1.  연만 중․북부의 중추사찰로써 선교양종 삼십일본산의 하나가 되며 현재는 조계종 제16교구의 본사로서 경북 안동, 의성, 영주, 봉화, 청송군 인근의 61개 말사를 통섭하는 등운산(騰雲山) 고운사(孤雲寺).
 
신라 중기의 고승으로서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께서 신라 문무왕 원년인 서기 681년에 창건, 1천3백여년의 사력(寺歷)을 자랑하며 고색이 창연한 대웅전을 비롯하여 물경 29개동의 요사로 흥성했던 그 옛날의 사세를 말없이 표출하고 있다.
 
 의상스님은 문하에 십대중인 오진(悟眞), 지통(知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을 두어 평생을 전교에 전념하며 무수한 도량을 창건한 중에도 십대찰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고찰로서 의상 당신의 신행에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게 하는데 부석사, 화엄사, 해인사, 갑사, 범어사, 미리사, 고운사, 보원사, 옥천사, 청담사 등이 바로 그것이다.
 
여타한 사찰은 거의가 인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나 유독 고운사만큼은 의성과 안동 사이를 우측으로 진입하여 무려 삼십여리나 입산한 계곡에 자리하여 창건 당시에는 인적과 교통이 지극히 소외되고 불편하였을 것임에도 사찰을 소개하는 현판에 명기하기를 건물의 동수(棟數)가 한 때는 366동으로 3천여 대중이 수도정진하였다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북 의성군 단촌면 죽계리116번지로 경북 지방의 조계종 본사가 제9 동화사, 제10 은해사, 제11 불국사, 제16 고운사 등 4개 대찰이 있어 전남과 함께 본사를 제일 많이 둔 고장이기도 한데 각설하고 현재의 고운사(孤雲寺)는 의상스님이 처음 창건 당시에는 고운사(高雲寺)라고 이름했던 것을 신라의 명 문장인 고운 최치원이 당시 여지대사와 여사대사의 협력을 얻어 이 절에 기거하면서 우화루(雨化樓)와 가운루(駕雲樓)를 세우고 난 다음 자신의 호를 따서 고운사라 개액(改額)했다고 사기에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 속 역시 해인사와 더불어 최치원이 시문을 즐기며 이미 쇠퇴한 조국 신라를 구할 수 없다는 진단을 내리고 해인사에서 입멸에 들기까지 많은 승지(勝地)와 명찰을 찾아다니며 불교의 신앙보다는 철학인으로서 인생관과 생리 및 풍수지리학 연구에 더욱 가까이 영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2.  고운사는 그후 제 3대 정종 3년(948)에 운주조통(雲住照通)이 중창을 하였고 제 8대 현종 9년(1018) 천우(天祐)대사가 중수를 했으며 조선조에 들어 숙종 21년(1695) 행옥(幸玉)과 태운(泰雲) 두 스님이 중건했는데 헌종 원년(1835)에 화재로 인해 반쯤 소실된 것을 만송(晩松), 호암(虎岩), 수열(守悅) 등 대덕들이 중수하여 대가람의 면모를 잃지 않고 면면히 유지하여 이 시대를 사는 불자들의 불심을 나투게 하는 도량으로 손색이 없는 것이다.
 
부산에서는 영천을 거쳐 의성에 이르고 다시 의성서 안동행으로 북동진하다가 단촌에서 12km를 동으로 달리면 구계리에 이르며 여기서 비포장으로 2km를 더 진입하면 작은 계곡을 중심으로 3천여평 개활지 위에 대웅전과 극락전을 포함한 요사 29개동을 만나게 된다. 여느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하촌 역시 없어서 외식을 할 적당한 영업집도 없으며 또한 숙박도 여의치가 못함이 흠인데 어느모로 보면 오염되지 않은 도량으로서는 전국 제일의 수행처로 삼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등운산은 해발 600m 정도로 산세가 비교적 온순하고 수세(水勢) 역시 빈약하여 주목을 끌기에는 미흡하지만 주차장에서 사찰입구까지의 1km에 달하는 울창한 송림은 가히 탐상할만하다.
 
지국천왕과 다문천왕, 비사문천과 광목천왕을 모신 금강문을 들어서면 자칫 폐가로 치부해 버리기 쉬운 고색의 가운루(駕雲樓)가 눈길을 끄는데 이 건물은 깊은 계곡 위에 밑으로는 물을 흘리며 가로 세워져 있어 자못 우아함을 드리우고 10여년 전에 주지로 부임하신 근일스님이 사찰 사이로 흐르는 계곡을 완전 복개하여 이젠 한 마당이 되어버린 넓은 도량 좌측에 극락전과 적묵당, 설선당(說禪堂), 우화루(羽化樓)가 중심이 되어 관음전, 동서별실금당(東西別室金堂), 회운당(會雲堂), 고운대암(孤雲大菴)이 차례로 묘를 이루며 가람을 배치했고 조금 떨어져 지장기도로 큰 영험과 신심을 자랑하는 명부전이 있어 한 번의 기도에 3시간씩을 계속하여 하루 4차례를 언제부터인지도 모르는 긴 세월 이전부터 지금도 이 절을 찾는 불자와 관광객을 맞는다.
 
 복개하기 전에는 계곡이 합치는 삼각주쯤에 대웅전과 고금당(古金堂)이 이마를 마주하고 대웅전에서 기도하고 난 후 대여섯 자욱을 옮기면 고금당에 들어 참선을 할 수 있도록 한국의 보통 사찰에서 볼 수 있듯이 대웅전 앞마당이 넓지 않고 대웅전 추녀 끝이 바로 고금당 선방으로 가람의 배치나 안목보다는 참선과 기도에 최대한의 배려를 한 듯 첫눈에 알아보기가 쉽다.
 
  근일스님은 선방인 고금당의 낙후를 걱정하여 우측 중턱에 30여 선객이 참선 수행할 수 있도록 고금당을 신축하여 이미 해제철인데도 20여 대중이 입추의 여지없이 참선공부에 정진중이고 현 대웅전을 중창하고자 기도와 권선으로 도량 면모 일신에 주력하고 있다.
 
경북 문화재 자료 제168호로 지정된 이 대웅전은 비록 면적은 좁으나 자연석 막돌쌓기를 한 기단 위에 덤덤 주추를 놓고 배흘림 없는 원주를 세워 이룩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외인출목(外一出目) 익공식오위가(翼工式五緯架)가 단층 맞배지붕으로 내부의 천정은 연동으로 되어 있으며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비교적 작은 건물이기는 하지만 가량수법(架樑手法)이 정교하여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로 좋은 본보기를 이루어 문화재 자료 지정답게 고색을 자랑하고 있다.
 
사지(寺地)가 계곡을 따라 협소하게 자리하여 배치가 다소 부자연스러운 대신 계곡을 끼고 울창하게 들어선 건물들이 흡사 고궁을 연상케 하는데 이 도량의 문화재로는 불사를 하기 전에는 금강문 옆에 있던 약사전을 지금은 대웅전 위쪽에 신축하여 이실(離室)한 새 건물 약사전에 비교적 적고 정교한 석조 석가여래좌불이 보물 제246호로 지정, 보호를 받고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재료는 화강석을 섰다. 불상이 높이가 79cm 이고 무릎의 폭이 65cm, 대좌의 높이가 72cm, 광배의 높이 1.34m로 8각 연대상에 정좌하고 광배를 구존한 좌상이다.
 
대좌의 8각 지대석에는 각 면에 1좌의 면상(眠像)이 둘려 있고 복연석(伏蓮石)에는 연화가 둘려 있다. 중대석은 팔각주로써 주형(柱刑)을 나타냈으며 광배는 두신양광(頭身兩光)을 구별하였으되 원형 두광 중심에 연화문이 있고 주위에는 당초문(唐草文), 신광 주위에는 보상화(寶相花)가 장식되어 있다. 이 상의 모형제작은 신라 통일기 불상의 형태를 지니고 있으나 비교적 짧은 동체(胴體)로 인하여 약간 위축된 듯 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가운루에서 우측 1백m 언덕에 고운사 3층 석탑과 과히 오래지 않은 고운사 사적비가 있다.
교통과 인적이 드물어 자연히 소외되어 오던 것을 근일스님이 가람면모 일신에 주력하여 지난해에는 단촌에서 구계리까지 12km에 달하는 2차선 도로를 완비하고 아스팔트포장을 하여 교통의 취약점을 말끔히 씻었으며 계곡의 협소성을 일소하고자 1백여m의 하천 복개로 이젠 마치 넓은 운동장을 연상케하는 가람 위에 무설전과 선원, 약사전을 신축, 아직 단청은 마치지 못했으나 산만한 가람배치를 절도있고 짜임새있게 조화하였으며 고운사란 현액이 나붙은 강당 바로 위쪽에 장엄 사찰의 규모를 알리는 범종각을 세워 1천5백관의 동종을 달아 하루 세차례Tlr 울려 지옥의 중생에게 구제의 소식을 전하고 운판을 달아 공중의 중생에게 성불의 기를 전하며 또한 목어를 울려 수중의 중생에게 불음을 전하여 공덕을 알리고 법고를 시방에 일갈하여 지상의 중생을 이고득락토록 사물을 완비하니 수행불사와 포교불사, 가람수호불사를 시작한 지 10여년이 세월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3.  이제 남은 일은 대웅전 중창과 신축건물의 단청, 그리고 주차장의 포장 등인데 하루 4차례에 걸쳐 3시간씩 지성으로 드려 12시간의 명부전 지장기도를 근간으로 지장도량답게 기도소리 등운산 자락을 울리는데 이처럼 오지사찰(奧地寺刹)로 일반 고찰에서 볼 수 있는 관광객의 기웃거림은 거의가 볼 수 엇고 또한 국립공원지역도 아니라 입장료는 애시당초 생각도 하지 않으며 도로포장 전까지만 해도 신도의 참배가 거의 없었으나 차량의 증가와 교통로의 치장에 힘입어 이젠 전국의 불자들이 화엄기도도량이란 점과 16교구 본사, 또한 지장기도를 위해 부단한 신도행렬이 이루어짐에 근일스님은 매월 마지막 토요일을 정기법회일로 설정, 설법과 지장기도 및 철야정진을 독려하여 참석인이 5백여 사부대중에 달하여 산사의 고요를 벗하며 수행 및 포교불사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이미 ·1천여 성상전에 천하를 주름잡던 명문장 최치원이 이곳에 들러 스님들과 교분을 나누고 불법을 공부하여 우화루와 가운루를 세워 자기의 호를 따 고운사라 이름하였으니 익히 풍수지리적이나 부처님의 기도처로는 의상스님의 선지(選地)를 받았으니 말대의 범부중생은 무슨 말을 더 보태겠는가.
 
치원은 신라 말기의 대석학으로 12세에 당으로 가서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당나라 내외관직을 역임하다가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병마 도총 황병(黃騈)의 종사관으로 종군하면서 서릿발이 서리도록 통쾌무변한 토황소적문(討黃巢賊文)을 지었는데 이것이 인심을 크게 감동케하고 이때부터 그의 문명이 중원에 떨친 신라의 문사이다.
 
그는 헌강왕 11년에 귀국하여 시독(侍讀)겸 한림학사가 되었으나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진성여왕에게 시무책(時務策) 십여조(十余條)를 진언하였지만 이미 쇠세(衰世)를 구할 수는 없는지라 벼슬을 버리고 산해(山海)간을 방랑하며 시문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해인사에서 죽었는데 사람들은 그가 선계(仙界)에 들었다고 일컬었다.
 
 이런 시성(詩聖)이 이 고운사에 거처하며 우화루와 가운루를 세워 가람의 확장을 꾀한 것을 보면 이 고운사의 존재 필요성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익히 적자생존의 원리처럼 차고도 남음이 있으며 후학들이 어지 관리하며 부흥시키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 되고 있다.
 
 옛 것을 버리고 새 것만을 선호하는 세태가 계속 만연하다 보면 역사성이나 민족의 얼쯤은 잠시 없어져 남의나라 문화에 길들여지는 주체없는 민족이 될 것이므로 우리의 선조와 역대 고승 대덕, 특히 의상과 같은 큰스님이 창건을 하였으니 이 고운사야말로 불자들이 힘을 합하여 호지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본지에서 한국의 사찰로 16번째 취재를 조계종의 16교구 본사를 탐방함은 무슨 인연인지? 기자를 보내는 근일스님은 배웅사에서 ‘불심은 곧 국가와 민족을 바탕함으로 가람의 흥성이 국가의 발전과 같은 맥락이어서 우리의 후손에게 물려줄 이 도량을 여법하게 중창하여 일면 호법하고 일면 호국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정진하며 부처님의 가람 확장불사에 임하는 중’이라고 다부진 결의를 들려준다.  금강문을 향하여 합장을 하는 기자의 등 뒤로 등운산을 비추는 늦봄 태양은 더욱 자비롭다.
 

 
오대산 월정사

문수보살과 함께하는 오대신앙
 
  초록빛 잎사귀 위에 살포시 얼굴을 내민 연꽃이 수면을 메워나가고 햇살마저 무지개빛으로 화사한 초여름. 무심히 핀 풀꽃마저도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이후로부터 그 몸짓과 향기를 달리하고 있음은 무슨 이유인가. 더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이같은 복덕이 중생과 함께 하고자 한 그 뜻이 있음이다. 그러한 뜻이 이 국토 어느 곳엔들 배여있지 않을까마는 오대산(五臺山)은 이 민족의 정신 속에 공통으로 흐르는 묵중한 무게로 흔들림없는 심지를 뿌리내려 주었고, 월정사(月精寺)는 적요 속에 무한의 포용력을 갖추었다.
 
너른 평야보다는 산악지대가 많아 산을 의지하며 살아온 우리 민족이 자연스레 갖게되는 산에 대한 외경심은 지리산의 성모와 가야산의 정견모주(正見母主)로 같은 산신(山神) 등을 통해 나타나 있고, 여기 오대산에는 진성(眞聖)의 거주로 신성함이 표출되었다.
 
진성의 존재를 믿게 된 것은 물론 월정사의 개산조 자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자장이 중국 태화지(太和池)가의 문수석상(文殊石像)에서 7일기도를 드리고 전해받은 게송을 풀기 위해 고민하던 중 홀연히 나타난 한 스님으로부터 그 풀이를 듣고 더불어 가사와 불두골(佛頭骨), 바루 등을 건네받았다. 그리고는 당신의 나라 동북방명주 경계에는 오대산이 있고, 그곳에는 일만의 문수가 항상 거주하니 가서 뵙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중국에서의 오대산은 보현의 아미산, 관음의 보타낙산과 더불어 3대영산으로 꼽힌 곳이니, 자장은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한 자신의 의지와 신념을 실현한 그 곳을 자신의 조국에서도 찾고 싶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시작된 오대산 신앙과 월정사.
자장의 문수친견 위한 월정사 창건 삼국유사의 보질도(寶叱徒)와 효명(孝明) 두 태자의 기록은 도
애산 신앙과 신비로움을 구체화하고 있다. 보질도와 효명 형제 두 사람은 함께 오대에 나아가 공경 예배하고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 차를 다려 1만 진신의 문수에게 공양하였고, 동대(東臺)․서대(西臺)․북대(北臺)․중대(中臺)의 오대에는 각각 1만의 문수가 상주하며, 진여원(眞如院)에는 문수대성(文殊大聖)이 매일 이른 아침 현신하여 36형으로 나타나 보인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 분의 문수보살로도 표현할 수 없어 오대에 각각 1만씩의 문수보살을 상주시킨 오대산의 공덕과 자장의 염원이 필설로 설명되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오대가 동서남북의 사방을 근거로 청(靑)․백(白)․적(赤)․흑(黑)으로 배색, 중국의 오행사상(五行思想)과의 습합이라고 여겨지는 것과 별도로 관음․미타․l장․석가․문수 등의 오대산은 진성이 거주하는 성지임을 강조하며 월정사 창건의 토대를 이루어 주었다.
 
오대산을 문수보살이 머무는 성지라고 생각했던 자장이 처음 이 곳에 온 것은 그가 당나라에서 돌아온 해인 선덕왕 12년 (서기643년) 이었다. 자장은 임시로 띠집을 짓고 문수보살의 진신을 친견하고자했다. 그러나 그가 머물던 3일동안 음산한 날씨가 계속되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때 그가 머물던 곳이 바로 현재 월정사의 시작인 것이다. 자장은 훗날 다시 8척방을 짓고 7일 동안을 머물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듯 자장은 문수진신을 친견하고자 했던 처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대산의 이 곳 저 곳을 옮겨 다녔는데 그 때의 자취로 원녕사(元寧寺)와 정암사(淨岩寺) 등의 사찰을 남겨 놓았다. 이렇게 시작한 월정사는 대규모의 창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황룡사탑 ․ 태화탑․통도사계단 등에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고서 이 곳 오대산의 중대에 그 나머지를 봉안한 적멸보궁을 중심으로 동대, 서대, 남대, 북대의 네 절을 지어 중대는 기도처로 나머지 4대(臺)는 수도처로 삼을 수 있었고 이후로 큰 절 월정사 또한 그 깊은 오대산 중에서 끊이지 않는 인맥과 불맥으로 발전되어 갔다.
 
자장의 창사 이후로도 신효거사(信孝居士), 신의두타(信義頭陀), 유연장로(有緣長老) 등이 서로 계속해서 절을 경영해와 세상에는 사성소주자(四聖所住者)라 하여 알려진 것이다. 한편 월정사란 이름 짓게 된 유래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오대의 동대에 해당하는 만월산(滿月山) 아래에 세워졌던 수정암(水精庵)의 정(精)과 만월산(滿月山)의 월(月)이 합해졌다는 이 추측은 동국여지승람, 수정암에 신라의 두 왕자가 수선했다는 기록과 함께 월정사와 별개로 기록되어 있어 신빙설을 절감시키고 있지만 문수보살의 오대산이 자장으로부터 비롯되었고, 그 당시 자장의 자취마다에 남겨놓은 사찰이 따지고 보면 다른 의미일 수 없다.

월정사의 개산조 자장율사
 
  순박하고 곱기만 한 천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 경포대가 있고 오죽헌의 절경이 그림같이 펼쳐진 강릉에 이르러 하늘과 바다는 공히 회색빛을 띠어 한 차례 비를 예고했고 축축한 공기를 가르며 월정사로의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월정사의 개산조 자장은 별이 떨어져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낳은 기무림의 아들이다. 생일까지도 4월8일 부처님과 같은날 세상에 출생하였고, 아들을 낳으면 시주하여  법해(法海)의 진양(津梁)이 되게 하겠다는 부모의 서원은 그가 전생부터 불법과의 인연을 위한 복덕을 갖춘 인물임을 알려준다.
 
 그의 성품과 지계에 대한 의지는 조정에서 진골출신의 그를 재상자리에 앉히려고 불러들였을 때 ‘내 차라리 계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한 한 마디에 응축되어 있고, 그를 신라시대 귀족불교의 표상으로 백안시하는 견해를 보류시킨다.
 
 자장이 선덕왕의 요청에 의해 본국으로 돌아와서 어려운 국내사정을 살펴보고 왕에게 황룡사 구층탑의 건립을 건의한 것에는 자장의 호국정신과 3국통일에의 염원이 깃들어 있었다. 불력에 의한 호국의 소박한 신앙심 뿐 아니라 여왕을 모시고 있는 황실의 권위와 신라의 국력을 과시하고자 한 황실적인 필요성이 함께 내재한 것이다.
 
 귀국 후 자장의 활동은 호국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의 활동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불교를 통한 국민교화와 불교교단의 기강확립이었다. 그는 궁중에서 대승론(大乘論)을 강(講)하기도 하고, 황룡사(黃龍寺)에서 7일동안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하기도 했다.
 
조정에서 그에게 대국통(大國統)이라는 높은 직위를 주어 전국의 모든 승니를 관장케 하자, 자장은 승니에게 불경을 공부하게 하여 매년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시험을 보도록 하고, 한 달에 두 번씩 계를 설하게 하며, 순검사(巡檢使)를 전국에 파견 지방의 사찰을 일일이 살펴 승려들의 과실을 징계하는 한편 불경과 불상을 정중히 모시도록 하는 등의 기강잡기에 전력을 다했다.
 
이같은 자장의 노력은 신라야말로 예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다는 불국토사상으로 대변 되어졌다. 일생토록 활발한 활동을 펴 왔던 자장이 말년을 보낸 곳은 오대산이었다. 계의 엄격함과 불교 교단의 기강을 바로 잡으려했던 자장은 자연히 매우 규범적이고 엄격한 윤리적 성격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오대산은 마지막 가르침을 전해주었으니, 그가 문수보살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옷이 남루한 늙은 거사가 죽은 강아지를 담은 삼태기를 메고 와서 시자에게 “자장을 만나보러 왔다”고 하자 시자는 안으로 들어가 자장에게 고했다. 자장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시자는 남루 방포한 거사를 꾸짖어 내쫓으니, 그 거사는 “돌아 가리라! 돌아 가리라!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갖고 있던 삼태기를 거꾸로 털자 삼태기 안의 죽은 강아지가 땅으로 떨어지며 사자보좌(獅子寶座)로 변했다. 그제서야 문수보살임을 알아챈 자장이 뒤늦게 따라가 보았지만 그 빛은 아득히 사라져 따를 수 없었다.

성역으로 보전돼야 할 월정사
 
  추적추적 내리던 빗줄기가 월정사의 일주문에 들어서면서 더 굵어졌다. 비를 맞아 더 맑아진 모습이 된 숲길을 따라 월정사의 본당인 적광전(寂光殿) 앞에 섰다. 전내에는 석굴암의 불상과 그 형태가 동일하다는 대불이 조성되어 있다.
 
지권인(智拳印)을 그 수인으로 한 비로자나불의 장엄함은 금당 앞 월정사의 자랑거리인 팔각구층탑의 화려함과 함께 더할 수 없는 환희심을 불러낸다.적광전의 위용과 걸맞게 힘차게 써내려간 주연의 눈길이 멈췄다.탄허(呑虛)스님의 친필이다
 
  萬代輪王三界主
  雙林示滅畿千秋
  眞身舍利金猶在
  普使群生禮不休
 
  현존의 월정사는 6․25의 참화로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초토위에 다시 건립한 당우다.
  이 일로 사중의 귀중품이 모두 재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중 선림원의 신라범종이 소실된 것은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이다. 팔각구층석탑 역시 화재로 인해 많은 열을 받아 법당 쪽으로 다소 기울어 있었으나 근래에 해체 수리하여 바로 잡았다.
 
 많은 장식적 수법으로 보아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하는 이 탑에는 중대의 적멸보궁과 마찬가지로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탑 앞면에는 정확한 명칭과 알 수 없는 석조보살좌상이 불사리탑을 향하여 정중하게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불탑에 대한 공양을 표하고 있다.
 
도량중창불사를 마감해가고 있는 월정사는 진신사리 찬탄법회, 오대산 신앙의 조명등을 통해 오대산의 성역화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뿐만 아니라 북방제일 선원이라는 명성을 날리던 청량선원을 다시 개설한다는 원력을 세워놓고 있기도 하다.
 
특히 유아교육에 관심을 갖고 근처 12군데에 유치원을 개원해 취학 전 아동들에게 일찌감치 불심을 심어주는가 하면 월정사 장학이라는 이름으로 1인당 10만원씩 연간 2백4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고 미결성의 영동불교장학재단을 추진하기 위한 준비를 차근히 해나가고 있다.
 
월정사는 진부면으로부터 강릉으로 통과하는 국도변에서 30리나 되는 산속에 있다 오대가 있는 상원사 주변까지는 무려 24km 가 넘는다.
 
이렇듯 그윽한 산세에 자리한 상원사까지라도 오대산을 찾은 바에야 둘러가지 않을 수 없다. 상원사의 성덕대왕 동종도 보아야 하고 청량선원 앞에 서서 이 곳에 새로이 모여들 눈푸른 납자들의 의기도 느껴보아야 한다. 
 

 
모악산 금산사

미륵불의 도량 금산사
 
  전북 김제의 너른 평야를 시야에 담을 수 있는 이 길의 끝에는 모악산(母岳山)의 봉우리가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고 그 아랫자락에 천년 세월 미륵 부처님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는 금산사 미륵전(金山寺 彌勒殿)을 만날 수 있다.
 
 기다림이란 때로 고통과 절망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애틋하고 간절한 희망과 믿음이 우세하지 않고는 끝까지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끝내 허무하고 무의미한 결과를 초래했어도 끝까지 기다릴 수 있었던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는 것이 또한 기다림의 미학(美學)이기도 하다.
 
인간은 평생토록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살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늘 반복되는 기다림 이외에도 자신의 완성을 애타게 기다리기도 하고, 소중한 사람과의 만남을 기다리기도 하며 때론 극락정토의 큰 서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이러한 기다림으로 인해 인생은 한 발 한 발 앞을 향해 내딛을 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것이리라.
 
미륵신앙이란 것도 어찌보면 이런 인간 심리에 따른 자연스런 산물일 수도 있고, 이런 이유로 미륵부처님의 도래를 반신반의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륵부처님의 도래를 굳게 믿고 극락세계의 큰 염원을 세운 이들은 그 기다릴 수 있는 힘으로 해서 미륵부처님이 아니어도 스스로 극락정토를 만들어 나갈 역량이 생겨나고, 그런 사람이 하나 둘 모이면 결국 이 세상은 미륵부처님이 도래한 것과 꼭 같은 세상이 될 수 있다.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는 힘은 무엇보다도 자비에서 구해야 한다. 큰 슬픔어린 눈으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큰 슬픔으로 갖게 되는 기다림을 금산사에서 배워가야만 한다.

모악산에 개산한 금산사의 시작
 
  따스한 햇살과 풀내음을 실은 바람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길이 금산사 일주문을 향해 쭉 이어져있고, 칡으로 즙을 내어 여행객에게 향토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는 푸근한 인상의 아저씨는 초여름 오후의 나른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늘에서 잠이 들었다.
 
일주문 바로 앞까지 벌서부터 모여든 행락객들로 인해 엄숙한 사찰의 분위기를 위협하기도 하지만 어떠랴. 이 민족이 이 강토에서 마음놓고 쉬었다가 삶의 향기를 재충전해 갈 곳이라고는 사찰의 향기와 손길이 어려있는 곳 밖에는 없는 것을. 그것만으로도 한국의 사찰들은 그 소임을 다하고 있다고 자부해도 좋으리라.
 
 몇 백년의 세월을 통해 자람을 해나온 수령 깊은 나무가 금산사의 역사를 말해주고 서 있다.
  하지만 이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이전에도 이같은 이름 모를 꽃이며 나무가 피었다가 쓰러지고 다시 성장해 나가기를 몇 차례나 거듭해 왔었다. 쓰러진 풀과 나무가 거름이 되어 다시 피어나고 자라난 나무들을 보면서 우리는 밑거름이 되어준 그전의 나무며 풀을 연상해 내야 한다.
 
  이렇듯 모악산은 이 나무가 심어지기 이전부터 넓은 가슴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금산사가 이 곳에 자리를 틀면서부터 모악산은 비로소 개산할  수 있었다.
 
 무성한 숲과 뭇짐승들이 깃들인 이 곳에 당우와 불탑이 세워지고, 극락정토의 의지를 밤낮으로 키워나가는 수도자들이 모여들고 그 속에서 산출되어진 문화가 백성들의 정신에 뿌리깊게 자리잡아 나갈 수 있게되면 무의미하게 서 잇던 그 산은 비로소 이름을 얻고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악산과 금산사는 다른 이름을 가진 하나의 뿌리에서 태동 되어졌다 할 것이다.
 
오랜 내력을 지닌 사찰의 초창이 늘 그러하듯 금산사 역시 그 시기와 개산조가 분명하지 못한 채 문헌마다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사적(事蹟)」에 의하면 금산사의 창건은 백제 법왕 원년으로 법왕이 즉위하자마자 칙령으로 살생을 금하고 그 이듬해에 금산사에서 승 38명을 득도시켰다고 한다. 「사지(寺誌)」에는 백제 법왕 원년에 왕의 복을 비는 사찰로 금산사가 세워졌지만 이 때의 금산사는 그 규모나 사격(寺格)으로 별로 큰 사찰이 못되었으므로 진표율사(眞表律師)에 의한 중창을 개산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후백제의 견훤이 금산사를 창건한 것으로 착각하는 기록을 보이기도 했다. 확실한 것은 진표가 출가하기 이전, 경덕왕대에 이미 금산사는 창건되어 있었고 금산사가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 시기는 진표가 중창을 이룩한 혜공왕대(惠恭王代)에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백제 법왕의 자복(自福)을 빌기 위한 개산이었든지, 왕위를 놓고 아들 신검이 아비 견훤을 감금시킨 비정이 서린 곳이든간에 금산사 초기의 무거리를 더듬으면서 우리는 진표율사에 의한 미륵신앙과 법상종의 근본도량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진표의 참회구도 그리고 미륵신앙
 
  모든 존재의 성질과 모습을 탐구하는 실재론적 입장의 불교에서 일체의 요소에 대하여 연구하는 법상종은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승 불교의 기본이념과 배치되고 있으므로 해서 학문적으로 대단한 의미를 갖고 있긴 하지만 이러한 종교성의 결여는 현재 그 지지기반을 상실하고 있긴 하다.
 
유식종(唯識宗)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법상종과 금산사와의 인연은 고려시대 금산사가 법상종(法相宗)에 속해 있었으며 「법장현찬(法華玄贊)」 「유식사기(唯識史記)」등 법상종 관계의 장소(章疏)들을 간행하고 있었던 사실과 진표율사 이후 금산사가 대가람의 면모를 일신하는데 주역을 맡았던 혜덕왕사가 해린국사로부터 법상의 배운 법상종의 대종사였다는 점이다.
 
현재 법상종의 근본도량이었던 과거의 역사를 소급해 보는 일을 금산사에서 찾아볼 수는 없지만 진표에 의한 미륵신앙의 흔적은 금산를 대표하고 있다.
 
어려서 활을 잘 쏘던 진표는 아버지를 따라 사냥을 하면서 자라났다. 어느 날인가 예의 사냥길에 나섰던 진표가 개구리를 잡아 나뭇가지에 꿰어 물속에 담가두었던 것을 잊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이듬해 우연히 그 곳을 지나다 자신이 지난 해 잡아 두었던 개구리가 그 때까지 살아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잘못을 뉘우치고 12세의 어린 진표는 구도의 길을 떠난다. 그는 일찍이 당에 유학하여 선도삼장에게 수업하였고 그후 오대산으로 들어가 문수보살의 감응으로 오계를 받기도 했던 것이다.
 
 진표는 독특한 참회수행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어느날 스승 순제법사는 진표에게 사미계법을 주고 「공양차제법(供養次第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2권을 주면서 “너는 이 계법을 지니고 미륵과 지장의 양성(兩聖) 앞에서 간절히 구하고 참회하여 친히 계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하라”고 하였다.
 
율사의 나이 27세 되던 해 약간의 양식을 가지고 변산의 불사의방(不思議房)으로 들어간 율사는 미륵상 앞에서 부지런히 계법을 구했으나 3년이 되어도 수기를 받지 못했다. 이에 발분한 그는 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고, 이때 홀연히 나타난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손으로 받들어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율사는 다시 뜻을 발해 3․7일을 기약하고 온 몸을 바위에 두들기듯 참회를 하여 3일째 되던 날은 손과 팔이 부러져 떨어져 나갔다. 7일째 되던 날 밤 지장보살이 손에 금장(金杖)을 흔들며 와서는 그를 가호하여 손과 팔이 전과 같이 되는 감응을 얻기도 했다.
 
 드디어 3․7일이 되던 날 천안을 얻어 도솔천궁이 내려오는 형상을 보게 되던 것이다.  이 때 지장보살은 계본을 주고, 미륵보살은 두 개의 목간자(木簡子)를 주었는데, 그 목간자를 통해 전생의 업보를 알 수 있게 되는 방법을 알게 된다. 그런 후에 그 지은 죄를 참회하는 정진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토록 팔 다리가 부러진다거나 돌에 몸을 던지는 등의 사신을 통한 참회의례로 반석 같은 구도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또한 미륵보살로부터 전해받은 목간자를 이용, 점찰법회를 열어 타락한 윤리에 대한 반성과 참회의지를 고취시켰고, 이는 죄를 참회한다는데 기본적인 목적을 갖고있는 대중교화의 한 방편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지장과 미륵 두 보살로부터 교법을 전해받은 진표가 산에서 내려와 대연지(大淵津)을 지날 때 나타난 용왕은 옥과 가사를 전해주었고, 그 용왕의 8만 권속의 도움으로 금산사의 중창을 이루기도 했다고 전한다. 또 그는 금산사에 미륵장육상(彌勒丈六像)을 모시고 미륵보살이 계법을 주던 모습을 금당 남쪽벽에 그려 넣을 만큼 그에게는 미륵보살이 매우 중요했다. 진표의 전기기록들이 그를 한결같이 율사로 말하고 있듯이 진표는 계법을 중요시 생각했고, 진표의 계법은 대승보살계사상(大乘菩薩戒思想)에 의지하고 있었다.
 
 「점찰경(占察經)」이 대승보살계의 근본을 이루고 있고 미륵보살의 설계(設戒)가 또한 대승보살계의 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음에서 그의 미륵에 대한 두터운 신앙을 알 수 있음이다.

수난의 역사를 감내해 온 금산사
 
  신라 법상종의 대가람 금산사에 남아있는 유적과 유물 중에 일부 석조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임진왜란 후의 조형물이다.  모든 당우와 전각들이 임란으로 인해 소실되는 안타까움을 보였는데, 이는 임란 구국의 3화상 중 뇌목당 처영(處英)의 승병 본거지가 금산사였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 후에도 알 수 없는 화재로 인하여 5여래6보살과 오백나한을 모셔둔 대적광전(大寂光殿)과 금산사 미륵신앙의 정수 미륵전내 본존불의 소실 등은 참으로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금산사의 안쪽 서전(西殿)에 계시는 스님 한 분은 7년 전 이 곳에 머물면서 볼 수 있었던 대적광전의 불보살님의 상호는 물론이고 뒤쪽 안벽에 관세음보살벽화의 장엄했던 모습을 떠올려 주셨다.
 
 “그 벽화를 그린 작가가 누군지는 알 수 없지요. 다만 어는 수좌가 이 곳에 하룻밤을 머물고 간 뒤 조성되었다는 신비한 벽화였지요”  이렇게 여러차례의 소실과 퇴락 속에서 근래에 금산사의 면모
를 일신시킨 분은 현주지 월주스님의 공로가 크다. 스님은 주지 취임 이래 모든 당우와 도량의 정비를 통한 수도처의 면모를 갖춤은 물론이고 전북지역내의 고찰 중수에도 큰 힘을 기울였다.
 
중생을 위한 민중불교를 말하는 월주스님은 항상 중생과 아픔을 같이 나눈다는 생각으로 자비와 용서, 포용의 마음을 가져야한다고 늘 주장할 뿐 아니라 금산사 근처 원평이란 마을의 청년회 활동 지원을 위해 연간6백만원의 지원금을 책정해 보조해줄 만큼 금산사 뿐 아니라 전북내의 불교활성화를 위해 힘쓰고 있는 것이다.
 
 금산사 경내에는 미륵전과 대적광전의 불사가 한창 진행중에 있다. 국가의 지원과 신도들의 시주금, 현 주지 월주스님의 원력이 한데 모아진 이 대불사가 원형의 복원과 고찰이 함께 이루어지고 있어 좀처럼 발 빠른 진행을 보이고 있진 못하다. 하지만 기어이 회향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다시 보게 될 미륵전의 위용을 떠올리며 하산한다. 위용을 떠올리며 하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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