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탐구 - 제2부 삼보 - 6장 교단의 성립과 변천
마이템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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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5 13:24
제 6 장 교단의 성립과 변천
1. 교단의 구성
(1) 스님의 어원과 명칭
스님이라는 말은 원래 ‘스승님’의 준말이다. 삼국시대 불교가 중국으로부터 전래될 때 귀족들은 불교라는 새로운 사상을 전래자로부터 배워야 했는데, 그러다보니 귀족들은 자기들을 가르치는 사람을 높은 위치의 스승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라의 스승이라는 의미의 ‘국사’, ‘왕사’가 생겨났고, 초기에는 스승이라는 의미의 ‘사’(師)의 예우를 뜻하는 칭호였는데 불교가 본격적으로 수백년간 민중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스승님으로, 오늘날 스님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원래 인도에서는 남(男) 스님을 일컬어서 비구(比丘)라고 하는데, 이 말은 걸사(乞士)라는 뜻이다. 비구니(比丘尼)는 여스님을
의미한다.
반면에 승려라는 말은 중국에서는 어느 종교를 불문하고 수도하는 자를 일컫는다. 천주교 신부도 승려요 수도사도 승려다. 그러므로 스님을
지칭하는 전용어는 비구(비구니) 또는 스님이라 함이 알맞다.
(2) 사부대중
보통의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어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수행과 복덕을 갖출 때 아라한(阿羅漢)이라고 한다. 즉, 깨달음을 성취한
단계이다. 우리는 이러한 아라한의 경지를 얻은 스님을 큰스님(대사)이라고 부르게 된다.
깨달음이란 중생에서 부처의 경지로 올라가는 순간에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이를 통해 중생은 진리와 합일되어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받아들이는 완전한 인격자의 상태에 이른다. 이때 어리석음이 사라지고 부처님과 같은 인격과 자비심만 남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고자 정진하는 보통 수행자들은 다시 둘로 나뉘어 재가수행자와 출가수행자가 있다 여기서 승가의 구성원을 일컫는
‘사부대중’이라는 말이 나온다.
사부는 ① 비구 (남스님) ② 비구니 (여스님) ③ 우바새 (남신도) ④ 우바이 (여신도)를 가리킨다. 비구와 비구니는 출가수행자이고,
우바새와 우바이는 재가신도이다. 여기에 출가한 미성년수행자인 사미(沙彌)와 사미니(沙彌尼), 식차마나(式叉摩那)를 더해서 칠중(七衆)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부지런히 노력하는 자라는 뜻의 사문(沙門)은 불교 수행자를 통칭하는 말이며, 교단내에서 수행을 쌓은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를
상좌(上座) 또는 장로(長老)라고 한다. 장로라는 말은 원래 불교용어인데, 기독교의 용례와는 달리 스님을 일컫는 용어다. 이러한 수행자를
대덕(大德), 존자(尊者), 구수(具壽)라고도 한다. 화상(和尙)은 제자를 기를 자격이 있는 자를 일컬으며, 아사리는 궤범사(軌範師)라고 해서
교단에서 제자를 받아들일 때 스승이 되는 사람이다. 계를 받을때는 아사리가 누구이며, 계사(戒師)가 누구인지 분명히 밝힌다. 보살계도 마찬가지로
전계화상을 밝혀 쓰여져 있을때도 있다.
우리는 종종 거사(居士)*나 처사(處士) 또는 다른 말로 청신사(淸信士) 또는 신남(信男)이라는 말로 우바새를 대신하며, 우바이의
경우는 보살 또는 보사(保寺 : 절을 보호하는 신도)와 청신녀(淸信女) 또는 신녀(信女)라는 말로도 대신한다.
우리나라에서만 여신도를 일컫어 보살이라고 하는데, 이때 보살은 상승경계에 들어가 대보살이 아니라 초심보살을 가리킨다. 뒤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사실 보살이라는 말은 스님들도 남을 위해 헌신하는 경우가 있으면 보살이라는 이름을 붙이는데서 볼 수 있듯이 보살이라는
명칭은 승속마저 초월하는 훌륭한 명칭이다.
대중(大衆)이란 많은 군중이라는 뜻으로 절에 모여 수도하는 많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중(衆)이라는 말은 본래 나쁜 의미가 없이,
스님들이 자기를 가리켜 겸손하게 사용한 명칭이었는데, 조선시대 유생(儒生)들이 스님을 가리켜 비하적인 의미로 사용한 바람에 왜곡되어, 오늘날
스님을 제외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은 무례가 될 수 있다.
* 거사란 인도에서는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 중국에서는 학덕과 재능을 겸비하고도 벼슬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통 출가하지 않고 집에 있으며 불교에 귀의하여 수행하는 남자 신도를 가리킨다.
(3) 계율 (戒律)
교단에 속하는 자는 삼보에 귀의하고 계를 지킬 것이 요구된다. 그래서 교단에 들어옴에 있어서 계를 받는데 이를 수계(受戒)라고
한다. 수계를 받으면 법명(法名)도 함께 받는다.
구족계(具足戒)를 받는 경우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 등을 받는데, 그 근본은 5단계에 있다. (자세한 내용은
지계바라밀에서 다룬다) 율(律)이란 교단의 규칙 가운데서 계(戒)와 그것을 위반했을 때 가해지는 벌칙, 그리고 교단행사에 관한 규칙을 말한다.
벌칙중에서 가장 큰 것은 교단추방으로 ‘바라이’라고 한다. 이는 오계중에서 불음주(不飮酒) 이외의 것을 파(波)했을 때 받는 벌이다.
교단의 행사중에는 안거(安居)가 있는데 매년 우기(雨期)에 수행자가 한 장소에 모여서 집중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출가수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행사중의 하나로, 인도에서는 하안거(夏安居)만 한다. 우리나라는 하안거뿐만 아니라 동안거(冬安居)도 있다. 출가수행자의 소지품으로는
삼의일발(三衣一鉢)이 허용된다. 의식주에 약품을 합쳐 4의(依)라고 한다.
2. 보살
대승(大乘)의 이상상(理想像)은 보살이다. 보살은 범어로 보디사트바(Bodhisatta)를 한자로 음사한 보리살타의 준말로,
구도자(求道者), 깨달음을 구해서 수도하는 자라는 의미인데, 원래 석존의 성도 이전의 칭호였다.
대승불교에서는 불(佛)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경지가 바로 보살임을 강조하고, 이에 따라 보살을 만인의 이상으로
삼았다. 보살은 자기의 깨달음에 관심을 갖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희생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되었다. 그래서 보살에는
항상 두 가지 좌우명이 따르는데, 위로는 보리(=지혜)를 구하는 것이요,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誓願)과
자기가 쌓은 선근공덕(善根功德)을 남을 위해 돌리는 회향(廻向)은 보살에게 절대로 중요한 것이 된다.
그리고 보살은 스스로 깨달음을 여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지원하여 이 세상에 머물러 일체중생을 먼저 피안에 도달하게 하는
뱃사공과 같은 자이다. 그러므로 보살이란 안으로 자신의 수업에 부지런히 노력하면서 밖으로는 중생을 구하기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이를
가리킨다.
사실 보살이란 깨달음을 얻은 자를 지칭하는 아라한을 초월한 존재다. 우리가 종종 의지하는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약사보살,
미륵보살 등은 바로 이러한 보살행을 잘하시는 대보살들이다. 석존도 길고 긴 생사윤회 속에서 보살로서 수행한 끝에 부처의 경지를 이루신
것이다.
대승경전인 「유마경」에 보면 주인공 유마거사는 한사람의 중생이라도 깨닫지 못하고 중생인 채로 있으면 자신만 편안하게 부처님 경지에
들어가 있을 수 없다는 얘기가 나온다. 보살이 되기 위해서 육바라밀이니 십바라밀이니 하는 보살행을 계속해서 실천해야 한다. 이러한 보살행에 의해
성불에 도달하는 것이 자연스런 이치다.
우리는 지혜의 화신 문수보살, 보현행의 화신 보현보살, 자비의 화신 관음보살 등등 여러 대보살님들 뿐만 아니라 넒은 의미로서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봉사행(=보살행)을 즐겨하는 사람들 모두 보살이라고 보고자 한다. 따라서 보살은 대보살, 출가보살, 재가보살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고, 경지에 따라 초발심(初發心)보살, 행도(行道)보살, 불퇴전(不退轉)보살, 일생보처(一生補處)보살 등 4계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행도(行道)보살은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보살을 말하고 불퇴전보살은 행도가 뒷걸음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한 보살을 말한다.
이 정도면 상당한 경지에 다다른 것이라고 칭송할만 하다. 초발심보살이란 부처님께 귀의하는 마음이 우러나온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교리법회
등에 참석하여 부처님 말씀을 듣는 자세가 된 사람이다. 마지막 단계의 일생보처보살은 대보살이 해당된다.
(1) 대보살
대보살은 마하살*이라고도 한다. 주로 불경 속에 나오며 부처님 당시에 있었던 상승경지를 얻은 보살이다. 상승경지란 깨달음을 얻은
스승이 수많은 생을 거쳐 복덕을 쌓고 급기야는 충만해진 자신의 복덕으로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활동을 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도달된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중생을 제도할 수 있으면 상승보살이다.
그래서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등은 상승보살, 곧 대보살이라 불린다. 이 분들은 모두 일체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봉사하고 희생하면서도 그러한 행위에 대한 자만심이 없었기에 진정한 보살행의 실천자가 되신 것이다. 이 분들은 지혜를 성취하시고 많은 세월동안
보답을 바라지 않는 봉사행을 닦으셨기에 부처의 경지에 다다르신 분이므로 불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신앙의 대상이 되신 것이다.
지혜와 복덕에 있어서 석가모니불을 능가하는 분은 없다. 석존은 처음 발심하여 3겁(40리 둘레의 정사각형 돌이 다 닳으면 1겁)을
윤회하면서 수행과 복덕을 쌓았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석존의 탄생에서부터 왕족으로 태어나 출가 후 모든 것을 버리고 득도하시여 부처가 되시고
열반에 드실 때까지 45년간 많은 귀족들과 평민들이 부처님을 받들며 평탄한 성자의 길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소위
성인이라고 칭하는 여타 성인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 마하살이란 마하살타의 약칭. 마하=큰, 살(살타)=용감한 마음이라는 뜻이다. 즉, 보살은 큰
원(願)과 행(行)이 있어서 큰 일을 위해 물러나지 않고 크게 용감한 마음을 내는 것을 말한다.
(2) 출가보살
머리를 깍고 스님이 된 사람은 출가수행자인데, 처음 발심한 스님은 초발심 보살이 된다. 점수돈오(漸修頓悟)든지,
돈오점수(頓悟漸修)든지, 점수점오(漸修漸悟)든지, 점오점수(漸悟漸修)든지 열심히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으면 아라한의 경지에 들게 된다. 이렇게
깨달음을 얻어야 아라한 즉, 큰스님이라 불리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깨달음을 얻고 수많은 영겁을 중생구제와 수행에 정진하여 복덕을 충만히 쌓아야
부처가 되는 것이다.
(3) 재가보살
재가수행자는 세속생활을 하면서 계를 받고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일반 불자가 해당된다. 부처님 당시 깨달음을 얻은 대보살의 경지에
이른 재가보살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머리에 화관이나 두건을 쓴 이유는 출가하지 않고 세속에 있으면서도 깨달음을 얻었고 보살행을 쌓아
지혜와 복덕을 베풀었다. 석존도 전생에 출가자의 모습으로 수행도 하셨지만 재가자로서 수행에 정진했던 경우도 많았다. 그러므로 불도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보살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주의할 것은 보살의 의미를 단순히 불교를 믿는 여신도라고만 생각하면 안된다. 앞에서 설명한대로 남성이든 여성이든
일반대중이든 간에 봉사행을 즐겨 실천하는 사람이면 다 보살이며, 불교를 믿는 불자도 보살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여신도를 보살이라고
혼동하여 부르게 된 연유는 아마도 도울 보(保) 절사(寺)의 합성어인 ‘보사’라는 호칭으로 스님들이 특별히 봉사행을 잘하는 여신도를 부른데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렇게 구별을 하고 보면, 상승경지에 들어간 대수행자를 일컫는 보살이라는 명칭을 초발심 불자에게 쓰는 것이 좀 의아스러울 수 있다.
그렇지만 쉽지 않은 봉사행을 하며 훌륭한 보살님들을 본받아 참다운 보살이 되라는 의미에서 여신도를 부르는 명칭이라면 불가한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이 보살행이 중요하게 취급된 것은 불멸 이후 대승불교에서부터이다. 이유인즉, 부처님이 참 진리를 깨닫고 45년동안 설법하신
초창기에는 각 개인의 깨달음 자체를 급선무로 여기시고 주로 개인의 수행과 진리의 깨달음을 강조하셨다. 그러다가 중반기 이후부터는 개인의 자각과
아울러 모든 중생의 구원이 주제가 되어 일체 중생의 성불과 이상 불국토(=살기좋은 세계)를 실현해야함을 설파하여 불교는 각 개인의 깨달음은 물론
모든 중생의 구제를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부처님 사상을 더욱 굳건히 정립시켰다.
이렇게 부처님의 교리가 완성되고, 부처님이 80세로 열반에 드시자 부처님 법을 이어받은 가섭존자를 중심으로 교단을 이끌어나갈때는
부처님이 계시지 않으므로 정법이 멀어져 혼탁해질 것을 염려하여 엄격하게 수행하는 가풍을 지키게 된 것이다. 그러던 승가의 수행이 부처님 열반 후
수 백년의 시간이 흐르니 승가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수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불법이 왜곡되고 잘못 이해되는 부분이
생기며, 유사한 불경이 조작되는가 하면, 여러 사회문제가 빚어져 더 이상 불교가 방관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에 불교학자는 흩어져 있던 부처님 말씀을 모아 다시 경전을 편찬하고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의 시발이다.
그리하여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 말씀을 전법(傳法)하는 일뿐만 아니라 그동안 등한시했던 일체 중생의 구제활동에도 적극 참여함으로써, 수행자들은
자기의 수행과 더불어 재가불자의 깨침과 행복을 위한 불교 본래의 사명으로 되돌아왔다. 이에 불경에 나타나는 보살사상이 중요시되고, 대보살의
수행과 사상도 신앙의 대상으로까지 발전되게 이르러, 재가불자들에게도 육바라밀과 같은 보살행을 강조하게 되었다.
3. 교단의 성립과 발달
(1) 교법의 전파
부처님의 원만하고 위대한 인격은 당시 사회를 교화하고 감화시켰고 동시에 심오하면서도 실제적인 가르침은 인심을 만족시키기에 족했다.
그리하여 원시 불교시대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출가하여 부처님께 귀의하여 제자가 되었고 또 재가불자들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직도 부처님의 감화가 주로 갠지스강 유역의 제국에만 미칠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부처님 입멸 300여년이 지난후에
중인도 마가다국에 아쇼카왕이 출현하여 전인도를 통일하면서부터 상황이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본래 평등주의와 자비사상으로써 세계적 종교의 성격을 갖고 있던 불교는 인도전역에 유포되는 동시에 다시 그 영역을 넘어서 북쪽으로는
히말라야 산간지대와 중앙아시아의 일부지역, 남쪽으로는 스리랑카, 동쪽으로는 미얀마, 그리고 서쪽으로는 멀리 그리스, 이집트까지 퍼지게 되어
세계적인 종교가 된 것이다.
다시 부처님 입멸 750여년이 지난 무렵 서북 인도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점유한 대월지국 카니슈카왕의 보호로
말미암아 이미 그 이전에 동점(東漸)을 시작했던 불교는 더욱 세력을 얻어서 인도와 서역지방으로부터 활발하게 중국을 향하여 퍼져 나갔고, 한국,
일본, 티벳 등 각국으로 유포되었다.
동시에 페르시아와 소아시아 방면으로 서점(西漸)하여 동서양 각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또한 동남 아시아쪽으로는 샴, 안남, 스마트라,
쟈바 등 남양군도에 까지 확장되었고, 북쪽으로는 러시아의 일부에도 전파되었다. 근래에 와서는 구미 각국에도 전파되어 불교는 세계 4대 종교
중에서 최고의 종교로 자리하고 있다.
(2) 승단의 파생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부처님의 제자들이 그 가르침에 대하여 제각기 자기들의 의견이 옳다고 주장하게 되었으며, 이 중에는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본래 계율 그대로만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과 보다 넓은 뜻으로 받아들여 수행하면서 수행장소나 그곳의 환경에 따라 변화도
적당히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제자들로 나뉘어 진다.
그리하여 이러한 견해차이는 점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어지며 발전하게 되는데 크게 구분해 보면 원시 불교시대,
부파불교시다, 소승불교, 대승불교 등으로 나눌 수 있다.
① 원시 불교 (原始佛敎)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루시고 설법하신 초기부터 그 가르침에 의지하려는 제자들과 교화받은 신자들은 점차 늘어났다. 그리하여 10대
제자를 비롯한 1,200여명의 아라한과 출가하지 못한 사람들은 재가신도가 되어 지극한 정성으로 부처님과 그 제자들에게 공양을 드리며 공경히
받들었으며, 이들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 100여년 흘러가도록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등불로 삼고 평화롭게 수행하였다. 이처럼 부처님
성도로부터 불멸후 약 100년까지를 원시 불교라 한다.
석존 생존 당시의 불교와 불멸후 약 100년 정도까지의 원시 불교시대에는 석존이라는 한 사람의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진리의 해석, 실천,
실현이 구현되었다. 석존은 이 세상 모든 것은 그 어는 것 하나도 인연따라 생성, 변화, 소멸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연기(緣起)의 도리(道理)를
설하셨고, 연기법에 뒤이어 제기되는 무아(無我)의 직관을 통해 이 세상에 나타난 무상성(無常性)을 알고 열반적정에 이른 것을 많은 사람들 앞에
몸소 구현해 보이셨으므로 모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원시 불교시대에는 그 중심축이 되셨던 석존의 존재와 말씀으로 말미암아 의견이 분분해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② 부파불교 (部派佛敎)
불멸(佛滅)후 한 동안은 부처님 재세시 이미 여러나라 왕들이 부처님을 초청하여 불법을 들었고 불교에 귀의했으므로 일반 민중에도
불교가 많이 유포되어있었다. 그래서 오직 자신의 수행에만 전념해도 되는 시기였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100여년이 지나자 점차 수행하는 방법이 달라지기도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잘 지키려는 쪽과 이를
어기더라도 다소 자유롭게 수행하려는 쪽으로 나뉘어지게 된다. 그래서 원시 불료에서 부파불교로의 이행은 특정한 성인 중심의 불교에서 율법과
교의(敎義) 중심의 불교로 이행(移行)된 것이다.
이 부파불교시대의 불교교단은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經)과 교단의 규칙(律)을 깊이 연구하고 발전시킨 웅대한 논서(論書)들을 작성하면서
많은 논쟁이 있었다. 이때의 논(論)이라는 말의 원어가 아비다르마이고, 이를 한역하여 흔히 아비달마*라고 하였는데, 그래서 이 시대의 불교를
아비달마불교라고도 칭한다. 즉, 부파불교에 이르러서 전대에 없던 논장이 더해져서 삼장(三藏)이 성립되었고, 이 중에서 논장이 바로 아비달마법을
특징짓는 내용인 것이다.
불멸후 200~300년이 경과하니, 부파불교에서는 이미 형해화(形骸化)한 율법과 교의만을 가지고 전통적 권위를 삼은 것은 석존의
가르침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게 마련이고, 따라서 불교의 법도를 충실히 표현하지 못하게 되는 이때부터 서서히 대승불교운동의 씨앗이 심어진
것이다.
경전의 제 2결집 때 부터는 부처님의 계율을 그대로 지키려는 쪽을 ‘상좌부’ (上座部)라 하고, 다소 변화된 속에서 자유롭게
수행하려는 쪽을 ‘대중부’ (大衆部)라 하며 두 갈래로 나뉘어지면서 최초의 분열을 일으키게 된다. 이 두 파를 근본이부(根本二部)라고 한다.
이것이 불멸후 약 4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상좌부에서 11갈래, 대중부에서는 9갈래, 모두 20갈래로 나뉘어지는데 이 동안을 부파불교 시대라
한다. 이를 흔히 소승 20부라고 칭한다.
상좌부(上座部)의 상좌(上座)는 나이 많은 어른이나 장로이다. 이들은 대중부(大衆部)에 비하면 아무래도 좀더 보수적이고 완고한 편이다.
반면에 대중부는 젊은 혈기에 가득찬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생각에 다소 융통성이 있는 자들이다. 그러니 하나의 계율만 가지고도 의견대립이 생기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자유주의자들은 기존 교단을 나와 새로운 부파를 형성하게 되고, 계속해서 부파로의 분열이 지속되어 모두 20여 갈래가 나게
된 것이다.
* 아비달마라는 말은 ‘법(다르마)에 관한’리라는 뜻으로 이는 부처님이 설한 법에 관한 연구라는
의미다.
③ 소승불교 (小乘佛敎)
부파불교 시대에 이르자 각 부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욱 깊이 연구하고 학문적, 이론적 체계를 정립하여 자기 부파의 우수함을
과시하려고 하였다. 그라나 당시의 사상가들은 이타행(利他行)에 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고 자리(自利)추구에만 몰두하였고, 매우 번잡한 이론을
일삼아 교리이해와 해석은 매우 극소수 전문가의 독점물이 되어버리게 했다. 이에 따라 더욱 깊은 연구와 교리발전에는 큰 업적을 남기게 되고 자신의
수행에는 매진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승가 외에는 가르침의 전파가 소홀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잘 짜여진 사변(思辨)의 기틀은
후세 대승사상의 체계화에 있어서 불가결한 기반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소승(小乘)은 오직 자신의 해탈만을 위하여 수행에 전념하고 설사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하여도 구제활등을 펴지 않는 소극적인
불교라는 의미로 쓰여지게 되었다. 이런 수행방식과 이론은 지금의 태국,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스리랑카로 전해져 이 지역 불교의 주종을
이루게 되었으며, 이를 일명 소승불교라고 칭하기도 한다.
④ 대승불교 (大乘佛敎)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400여년의 시간이 경과된 후, 지나친 분열을 일삼는 소승부파불교에 대한 반발, 기성세대의 교만과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이 뜻있는 많은 신도와 스님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불교사상운동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것은 소승불교의 소극적인 면에 불만을 가지고 불교를 더욱 적극적으로 본래 부처님의 가르치신 뜻에 본질적으로 충실하고자 주장하는
이른바 대승불교 운동이다. 사실 불교는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로, 그리고 대승불교도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발전되었다. 소승에서는 진리에 대한
해석이 아직 불완전했고 대승불교에 와서야 보완되고 완성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겸비한다. 이전의 부파소승불교에서는 타인의 구제보다 자신의 구제에 관심을 가졌던 바에 비해서
대승불교는 타인을 위한 활동이 바로 자리(自利)를 위한 수행의 완성이 된다는 교리이다.
둘째, 재가(在家)와 출가(出家)를 일관한다. 부파소승불교가 출가주의인데 반해 대승불교에서는 재가자를 배제하지 않고 차이를 두지
않는다. 그래서 대승의 승(乘)은 실어나르는 것을 뜻하고 대승이란 이것이 크다는 의미다. 출가와 재가에 관계없이 이상적인 인간상을 추구하는데
이것이 바로 보살이다.
셋째, 신심과 실천을 중시한다. 그래서 대승에서의 실천 덕목인 육바라밀이나 십바라밀은 대단히 중요시된다.
넷째, 부처님의 구제력을 중시하여 이의 근거가 될 초인으로서의 부처에 대한 이론이 발달했다.
다섯째, 모든 사람이 보살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의 보살은 부처에 대한 신앙을 기초로 하여 자기가 보살이라는 신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대승의 보살은 부처와 똑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자이므로, 이는 곧 누구라도 부처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보살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誓願)과 깨달음의 결과를 중생에게 돌리는 회향과 자비에 바탕을 둔 실천덕목인 육바라밀을 중시한다.
이후 많은 대승경전들이 제작됨에 따라 대승불교는 불교교리를 발전시켰는데, 이렇게 발달한 대승교의(敎義)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신앙의 대상이 되는 부처의 본원(本願)과 정토(淨土)를 설하며 자비를 칭송한다. 또한 불신론(佛身論)은 진리 그 자체로서의
부처님(法身)과 중생의 구제를 위해 몸을 나눈 부처님(色身)이외에도 구체적으로는 시방삼세에 온갖 부처가 존재한다고 설한다.
둘째, 실천의 주체가 되는 보살행으로서 육바라밀 등을 설천 덕목으로 설하며, 그 수행의 단계로 십지(十指)를 설한다. 또한 이상적인
대보살로 문수, 보현, 관음 등의 활약을 설한다.
셋째, 실천의 기반으로서 진리관은 부처님의 성도하심을 원점으로하여 이것을 모든 현상의 연기(緣起)속에서 찾고자 하며, 이것을
진여(眞如) 또는 법계(法界)라 부른다. 또한 그의 특색을 공(空)이라 파악하고, 반야바라밀에 의해 공(空)을 체득하는 것임을
설한다.
요컨대, 대승불교는 소승불교가 자기수행에 절대 중점을 두는 반면, 보살행을 실천하여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적극적인 자세로 나와 남을 이롭게 하는 정신으로 근본을 삼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속에서 부처님의 공덕을 높이 찬양하기 위하여 불탑을 세우는 등
다양한 불교문화를 육성 발전시켰다.
그런데 대승불교운동에는 세속에 있는 재가불자들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그러다 보니 불경에 있는 보살사상이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어
불경에 나타나는 대보살들의 수행과 사상은 일반재가자의 모범이자 신앙의 대상까지 되었다. 이렇게 보살사상이 크게 연구되고 후세대 불교의
중요사상으로 발전되었다.
이와 같이 자신의 해탈과 중생의 구원을 겸하여 수행하는 대승불교는 인도의 용수*, 세친*, 무착* 등을 비롯해 중국의 달마대사로부터
혜능스님 등을 거쳐오며 크게 발전되었으며 우리나라, 중국, 일본 등이 대승불교권에 속한다. 이에 우리나라도 자신의 수행과 중생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불교가 정착된 것이다.
* 용수(龍樹 150~250년경)는 남인도사람으로 불교 및 타 종교에 정통하여 후대 중국에서는 ‘팔종(八宗)의 조사(祖師)’라고까지
추앙받은 인물이다. 「반야경」의 공(空)사상을 크게 발전시켰다.
* 세친(320~400년경)은 무착의 동생으로 처음에는 소승학자로 활동하여 「구사론(俱舍論)」을 지었다. 그후 무착을 따라 대승으로
전환하여 유식사상에 관한 몇가지 논서를 남겼다.
* 무착(310~390)년경)은 유식학파의 개조(開祖)인 미륵(270~350년경)의 제자다.
⑤ 밀교 (密敎)
대승불교의 마지막 단계로서 7세기 후반경에 밀교가 등장한다. 밀교란 흔히 대승불교의 최종단계라고 하는 것인데,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종교적 생명력을 잃게 되자 민중의 요구에 응하여 등장한 것이다. 밀교는 현교(顯敎)에 반대되는 명칭으로, 현교란 널리 대중에게 개방되어있는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그 세계관이나 종교적 이상에 도달하는 법이 명료하게 언어로써 표현된 불교이다. 이에 반해 밀교는 자신을 비공개적인 교단의
내부에 폐쇄하고, 비밀스런 교의와 의례를 사자상승(師子相承) 즉 스승과 제자사이의 은밀한 전달을 통해 간직하고자 하는 비밀불교이다.
따라서 불교의 실제 신앙형태에 있어서는 밀교가 불교의 독자적인 한 흐름으로서 정립되기 이전부터 밀교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요소들이 대승경전에서 이론적 근거를 찾아 이론이 체계화되면서 발전정립된 것이 밀교이다.
밀교의 사상과 실천적 요소는 복잡하지만 그 근원은 인도 토속의 신앙형태가 바탕이다. 그 대표적 요소가 인도의 고대성전인
‘아타르바베다’에 있는 주법과 주문 등이다. 그 특징은 주술적인 의례의 조직화와 신비주의이다.
불교에 있어서도 이러한 주술적, 신비적 특징은 이미 초기경전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바, 시대가 지남에 따라 점차
표면화되었고, 대승경전에 이르러 더욱 부각되게 되었다. 그 예로 「반야심경」은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라는 주문, 즉
다라니*로 끝맺고 있는데, 특히 밀교는 이런 다라니의 주술적인 힘을 중시한다.
간혹 우리가 밀교를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좌도밀교 때문이다. 서구인들이 밀교를 가리켜 탄드라불교라고 칭하는데, 이는 좌도밀교와 같은
것이다. 좌도밀교란 여성과의 성적인 의례를 근간으로 하지만 그 본질에는 여성의 기능을 우주적 요소로 파악한 인도의 관념과 성적의례를 통해
부처님이 얻었던 깨달음을 체험한다는 데에 근거한다. 이것이 처음부터 감각적인 환희 자체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는데, 실제 형태에 있어서 일반인들의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인도에서 탄드라는 주술적이고 신비적인 의궤를 가리키는 말로서, 탄드라를 밀교라고 볼 수도 있지만, 우리가 보통 말하는 밀교는 비로자나로
상징되는 우주와 내가 합일되는 신비적 체험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 체험을 위해 다라니, 만다라 또는 진언(眞言)과 같은 주술을 이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하여 밀교는 현재의 몸 그대로 성불하기를 추구하는 것이므로 실재와 현상이 자기의 한 몸에서 융합하는 원리를 세운
불교이다.
* 다라니란 능히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이치를 받아들이고 지녀 잃지 않는다는 듯인데, 하나의
글자, 하나의 말속에 모든 종류의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지니고 악한 법을 능히 막아주는 것이 있다고 한다.
4. 우리나라의 불교
기원을 전후하여 중국에 전래된 인도의 불교는 처음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나 점차 성숙되면서 천태종, 화엄종, 선종 등 여러 학설이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중국 전통사상과도 다르고 인도의 사상과도 다른 독특한 불교를 형성하여, 특히 달마이후 생겨난 선종(禪宗)이 6조(祖)
혜능스님 이후에 5가(家) 7종(宗)을 이루며 발전하여 곧 중국 불교의 선종을 확립해가며 발전하여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에까지 유학승 등을 통해
많은 영향을 끼쳤다.
중국에서 먼저 연구된 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시기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이라고 보고, 12년 뒤 384년에는 백제에,
또 신라는 572년 법흥왕 때 불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우리나라에 전래된 불교는 처음에는 대부분 귀족중심의 불교였으나, 점차 대중불교화하며 나라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1,600여년을 줄기차게 이어오며 민족문화 곳곳에 그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이땅에서 불교가 찬란하게 꽃피었을때는 나라 역시 번창했으며
국민 각자의 정신적 자세와 호국의 이념도 깊이 심어주었다.
고구려에서는 17대 소수림왕 2년(372년)에 불교를 처음 받아들였으며 당시는 모든 사람들이 불교를 믿도록 함으로써 흩어진 민심을
모으고 백성을 보호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백제에서는 15대 침류왕 원년(384년)에 불교를 받아들어 온 백성이 믿고 생활토록 하였다. 그 후
26대 성왕때 이르러서는 불교는 더욱 꽃피었으며 성황 30년(522년)에는 일본에까지 불교를 전하여 일본의 문화발전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훨씬 늦게 23대 법흥왕 14년(572년)에 와서야 불교를 인정했으나, 실은 오래전부터 불교를 신봉한 결과
이때에 이르러 공식화한 것임을 삼국유사 등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이에 신라사람들은 불교를 통하여 서로의 힘을 합했으며 기존의 문화를
더욱 눈부시게 발전시켰고, 그 결과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큰 유산을 남겨주었다. 한편 화랑정신으로 무장하는 근본이 되었으며 끝내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정신적 바탕을 이루었다.
고려시대에는 나라의 발전과 백성의 평안을 위해 불교를 숭상한 결과 갖가지 불교행사를 가졌다. 또한 몽고의 침략으로 나라가 어려웠을 때는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백성의 마음을 한 곳에 뭉치게 하여 국란을 극복하는 힘이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펴왔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면면히 이어져 왔으며 한글의 창제와 반포에 미치는 힘 또한 매우 컸다. 세종대왕은 당시 수양대군이었던 세조에게 명하여 석존의 일대기를
편찬하여 훈민정음으로 해석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짓도록 했으며, 세종이 이것을 보고 감탄하여 친히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지어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였다.
이렇듯 한글이 창제되자 가장 먼저한 일이 불전(佛典)의 번역작업이었다. 수양대군은 후일에 왕이 되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더욱더 많은 불경을 우리 글로 번역하는 일을 했다. 당시 번역해서 간행한 법화경, 능엄경, 금강경, 원각경, 반야심경, 아미타경, 선종영가집 등
많은 불교 경전은 국가시책으로 이루어진 큰 사업이었으므로 그 내용과 체계가 매우 훌륭하고 불경 번역의 모법이 되고 있다.
또한 임진란때는 서산대사, 사명대사, 처영대사, 영규대사 등이 주축이 되었고, 병자호란때는 명조대사, 벽암대사 등 많은 스님들이 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섰다. 비록 국가로부터 갖가지 박해를 받더라도 난리 중에는 나라를 구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섰으며 대자비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근대에 와서도 한때 일제의 강점기를 지나면서 일제의 우리 전통 불교 말살정책으로 존폐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광복과 더불어 다시금
우리의 전통불교를 찾게 되었다. 꾸준하게 우리의 불교를 지키려는 뛰어난 스님들의 노력에 의해 우리의 불교가 다시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