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탐구 - 제2부 삼보 - 7장 육바라밀 - 선정(禪定) 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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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탐구 - 제2부 삼보 - 7장 육바라밀 - 선정(禪定) 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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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선정(禪定) 바라밀
 
  (1) 선정(禪定)의 의미
 
  선정의 선(禪)은 범어댜나(dhyana)를 음역하여 선나(禪那)로, 이를 다시 줄여서 선(禪)이라 한 것인데, 보일시(示)와 홑단(單)이 합쳐서 만들어진 글자다. 즉, 오로지 하나를 보라는 의미이다. 그 뜻은 고요히 생각한다 해서 정려(精慮) 또는 생각으로써 닦는다 하여 사유수(思惟修), 또는 생각을 가라 앉혀 정신을 집중시킨다 해서 정(定)이라 번역하기도 하며, 음과 뜻을 합쳐 선정(禪定)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선정(禪定)이란 좌선, 집중, 삼매, 몰두 등의 뜻이 있고, 한자로는 적정삼매(適定三昧)라고 한다.
 
불교에서 선(禪)이라 하면 문자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旨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즉 ‘곧바로 마음을 가리키고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는 것’이라 한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이란 경전 공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글이 미치지 못하는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깨달음이 있다는 것인데, 이는 체험으로써 터득되는 것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란 언어나 문자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그 진정한 의미는 문자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결코 문자를 완전히 부정하는 게 아니다.
 
직지인심(直旨人心)은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킨다는 의미인데, 선(禪)이란 또렷이 밝은 우리 마음을 바로 가리킨다. 마음은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 행위자이다. 마음이 주체가 되어야지 대상이 된다면 벌써 그 본성을 잃은 것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은 본래의 성품을 보는 것이 성불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본래의 성품은 밝음과 어둠이 없으며 대소가 없고 안팎이 없고 생멸(生滅)이 없다. 이는 바로 법신의 부처님과 하나되는 것이므로 성불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선(禪)이란 교리로써 표현될 수 없는 체험의 세계요, 문자에 한정 구속되지도 않고, 사람의 본심을 바로 가리키는 일이며 본심, 즉 본성을 보아 성불을 이루는 길인 것이다. 이러한 선(禪)의 수련을 통해 자타가 불이(不二)함을 깨닫게 되고 자기만 옳다는 소아적(小我的) 생각에서 벗어나 큰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부터 통일신라 말기에 전래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오늘날 서양인들에게도 선(禪)은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일본어 발음의 젠(Zen)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교도의 명상법인 요가(瑤加)와 불교의 선(禪)은 엄연히 다르다. 이교도의 선(禪)이나 요가는 수행자가 선(禪)을 통해 범신(梵神)의 본성과 일체화되어 천상에 태어나기 위함이다. 반면에 불교의 선(禪)은 순수의식을 집중시켜 실상을 자각하고 반야(般若)를 얻어 해탈을 이루는데 있다. 석존은 설산에서 내려와 몸을 깨끗이 하시고 마음을 홀가분하게 하신 후에 우유죽 공양을 드시고 보리수 아래에 바른 자세로 앉아 심심삼매에 드셨다. 그리하여 우주와 생명의 실상을 깨치신 것이다. 그래서 선정은 삼매(三昧)와 같은 말인 것이다.
 
 (2) 입정(入定) 수련
 
  대개 선정이나 좌선이라고 하면 정신통일만을 연상하지만 정신 집중도 선정에 속한다. 즉, 정신을 한 곳으로 몰두하여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로 집중된 상태를 말한다. 한마음으로 정성을 모으는 일처럼 우리는 정신을 집중시키지 않고서는 무슨 일이든지 성취하기가 힘든 법이다. 일마다 번뇌망상과 잠이라는 마장이 끼여 선정에 들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화두나 염불로 8만 4천가지 마장과 갖가지 유혹을 물리치고 고요한 마음에 머물게 되면 선정에 들게 된다.
 
수련 시 바로 집중되고 선정에 드는 사람은 진리대로 된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진리는 알기만 해서는 안되고 실천이 뒤따라야 하는데, 중생들은 다겁의 습관이 남아있어서 혹 진리를 알더라도 실천이 쉽지 않다. 그래서 아는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선정에 드는 수련을 해야 한다. 수련할 때 번뇌망상과 잠에 휩쓸리는 사람은 아직 중생의 경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선정을 강조하는 것이다. 자기의 의지대로 오직 하나에 몰두해 있는 힘이 곧 진리를 실천하는 힘이 되는 것이므로, 불자라면 당연히 선정에 들어가는 수련을 생활화해야 된다.
 
 입정(入定)을 위한 것으로는 참선삼매, 염불삼매 등이 있는데, 참선삼매는 주로 스님들이 하시는 입정법이고, 염불삼매는 일반 불자들의 입정법이다. 흔히 선정은 우리에게 네 가지의 기쁨을 준다고 「잡아함경」에 나와 있다. 즉, 초선(初禪)으로 악이 사라지고, 이선(二禪)으로 선정의 기쁨을 맛보게 되며, 삼선(三禪)으로 무소유의 경지에 스스로 머물게 되며, 사선(四禪)은 무심을 얻게 한다.
 
卍. 참선삼매 (參禪三昧)
 
  ① 좌선
 
  참선은 몸과 마음을 고르는 수행법으로서, 일반적으로 좌선(坐禪)을 많이 택하여 수행한다. 좌선은 먼저 자세를 잘 가다듬어야 한다. 정좌하되, 가부좌를 틀거나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다리 밑에 완전히 놓는다. 팔목은 허벅지와 옆구리 사이에 살포시 올려 놓되, 왼손을 오른손 위에 올린 다음 엄지끼리 붙힌다. 그 다음 몸을 좌우로 살짝 움직여 고정시키고 허리를 곧게 펴고 턱을 당겨 머리를 수직으로 한다. 눈은 반안반개(半眼半開)하여 시선은 자기 앞 1.5m 정도의 전방에 자연스럽게 던져놓고 물체를 보지는 말고 마음의 세계에 들어가야 한다. 혀는 입천장에 갖다 붙이고 침이 입안에 고이면 모았다가 삼킨다.
 
다음으로는 호흡을 고르게 해야 한다. 호흡에는 들숨과 날숨이 있는데, 입은 다물고 코로 숨을 길게 천천히 들이 쉬어 배꼽 아래 3치(4.5cm) 지점인 단전까지 숨을 몰로 내려와 아랫배가 약간 볼록한 느낌이 들도록 들이 쉰다. 그리고 천천히 내쉬어 탁기를 내보낸다. 숨쉬는 시간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으므로 얼마동안 들이쉬고 내쉬고 해야 한다는 규칙은 없다. 다만 자신의 평상시 호흡보다 약간 느리게 하되, 지나치게 길게 해서 호흡이 힘들게 되어서는 역효과이니 주의한다.
 
즉, 자연적인 호흡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자세가 바르면 호흡은 느려지게 되어있으니 조급해 말아야 한다. 이러한 호흡을 단전호흡이라 한다. 속가에서는 이 호흡을 발전시켜 달리 응용도 하는 모양이나 불가에서는 일단 여기까지 순조롭게 되면 된다. 그 동안 가슴까지만 내려오는 짧은 호흡으로만 살았기 때문에 초기에는 제대로 쉽지 않다. 그러나 조금만 연습하면 단전호흡이 익숙해지고, 신경쓰지 않아도 저절로 되면 다음으로 관(觀)을 해야 한다.
 
 관(觀)은 마음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몇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아무 생각없이 들어오는 숨과 나가는 숨을 보는 수식관(數息觀)이 있다. 또는 들어오는 숨을 쉬며 하나... 하고 헤아리고 나가는 숨을 쉬며 둘... 하고 계속 반복하는 방법도 있다. 두 번째로 백골관(白骨觀)이라는 것인데, 사람의 외형을 벗겨내면 남는 것은 겨우 백골이므로, 이것을 보는 연습을 통해 사람의 근원을 관하게 되는 것이다. 세 번재로 여시관(如是觀)이 있다. 이는 부처님의 진리를 관하는 방법으로, 공(空)이나 불성(佛性), 사상(四相) 등을 하나 정해서 명상을 한다.
 
이처럼 관법(觀法)은 부처님 말씀을 어느 정도 이해한 상태에서 수련해야 불법(佛法)에 어긋나지 않는 결론을 얻게 되는 법이다. 관을 잘하여 부처님의 눈과 같아지면 자연히 깨달음이 온다. 그러므로 초심자는 수식관이나 화두참구법으로 접근하는 편이 좋다.
 
② 화두참구법 (話頭參究法)
 
  이것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취하는 수행법이다. 화두(話頭)란 ‘말머리’라는 의미로 화(話)는 ‘말’이며, 두(頭)는 ‘공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즉, 우주의 이치를 가르치는 법의 말이다. 달리 공안(公案)이라고 하는데, 이는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공문서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던져진 풀어야 될 문제이며 삶의 의문이 바로 화두이다. 화두는 1,700여 가지가 있는데, 참선은 이 문제 가운데 하나를 취하여 좌정해서 명상속에서 푸는 것이다. 예컨대 제 1화두는 ‘이뭣고?’(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인데, 부처님이 명상하셨던 것이다. 화두는 다른 관법과는 달라서 마음을 헤아려 답을 찾는게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망상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래서 화두를 참구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혼침(婚沈)과 망상이다. 혼침은 산란하고 잠 오는 혼몽한 경계이다. 그래서 앉아있기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짓이다. 망상과 혼침이 일어나면 수없이 오직 화두만 잡으려고 애써야 하며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성성(聖性)하고 깨끗한 상태로 무심속에 얻은 고요의 극치인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들어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오직 의심 하나만 갖고 답이 절로 나올 때까지 정진해서 이미 자신속에 있는 답을 발견하는 것이다. 막연히 기다리면 안되고 계속해서 자신의 본 성품인 자성(自性)에게 질문을 던져서 본성의 문이 열리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어느 날 문이 열리게 되어있는 것이 참선이다.
 
③ 깨달음의 세 가지 조건
 
  참선을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그래서 선정(禪定)을 이루는 데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조건은 신심(信心)이다. 역대로 신심을 저버리고 불타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없다. 나도 불성을 지닌 존재로서 깨우칠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을 가진 신심(信心)을 지니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불성이 있음을 몸소 보여주신 부처님을 향한 믿음이기도 하다. 부처님도 이 길을 걸어서 인생의 의문을 해결했고 역대 선사들도 이 길을 걸어서 평안을 얻은 것이다. 그 분들이 우매해서 출가하신 게 아니다.
 
오직 참 진리만이 영원하다는 믿음을 굳게 갖고 계셨던 때문이다. 이러한 신심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선 것이다. 그래서 「화엄경」에는 초발심이 발할 때 바로 정각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신심은 한동안 일어나다가도 어느 순간 수그러들기도 한다. 그러다 또 재발심이 일어난다. 일생을 수행하다보면 재발심의 순간이 있다. 마치 바람이 강하게 불수록 나무뿌리가 더욱 단단히 박히는 이치처럼, 재발심이 있어야만 다시는 후퇴되지 않는 신심을 갖게 된다. 종국에는 진리에 눈을 떠야 신심이 퇴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신심을 위해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조건은 인생에 대한 의심을 가지는 것이다. 의심이 없으면 진리에 목마르지 않기 때문에 깨달음의 연을 만나기 어렵다. 우리는 이처럼 철저한 의심을 통해 우주의 실상을 보게 되며, 의심이 크면 클수록 크게 깨닫게 된다.
 
화두참구에 있어서 의심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의심에 의해 지속적인 지구력을 갖게 되고 끝내는 답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화두는 의심을 일으켜서 망상과 잠을 극복하고 고요하고 깊은 정신 세계에 들어가도록 한다. 이때에도 의심을 놓쳐서는 안되며 마침내 지혜가 발현될 것이다. 그래서 화두 그 자체를 선(禪)으로 보기도 한다. 우리는 화두삼매에 들어서 지금까지 밖으로만 치닫던 마음을 안으로 모으게 되고, 종국에는 실상(實相)을 직시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조건은 용맹심이다. 오직 정진하겠다는 대용맹심을 가지는 것이다. 용맹심은 백수의 왕인 사자처럼 돌진력과 지구력을 길러준다. 그래서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삶의 문제를 푸는 것은 대용맹심이 아니면 이루기 어렵다.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하는 자라면 사자와 같은 기상이 있어야 한다. 일찍이 효봉스님은 흙돌로 문을 봉하고 1년 6개월을 답답한 토굴속에서 정진한 끝에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런 것이 다 용맹심에 의한 것이다.
 
卍. 염불삼매 (念佛三昧)
 
  염불삼매는 주로 재가불자나 기도수행하는 스님들이 행하는 선(禪) 수련법으로서, 정신을 몰두하여 부처님의 명호를 간절히 염(念)하면서 삼매경에 들어가는 방법이 참선삼매와 다르다. 그러나 얻어지는 효과는 참선삼매와 동일하다.
 
 염불이란 불보살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불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염불뿐만 아니라 경을 보는 간경, 불경을 읽는 독경도 포함된다.
 
염불은 참선과 달라서 언제 어디든지 자세와 관계없이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염불할 시간과 대상을 정한다. 세계적으로 80%정도는 관음신행을 하니 아직 정하지 않은 사람은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시간이 정해졌으면 간단한 경을 한가지 읽는 것이 좋으니, 「반야심경」이나 「천수경」 등 짧은 경을 읽고 난 후 108염주 등을 돌리면서 염불하도록 한다.
 
그런데 염불은 반드시 마음으로 불러야 된다. 그래서 염불은 소리를 내지 않아도 되지만 가능한 작은 소리를 내어 송불(誦佛)도 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염불하다가 이상하게 집중이 잘되는 시기가 오면 용맹정진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무슨 공부든지 꾸준히 해야 성취할 수 있는 것처럼 염불도 마찬가지다. 너무 용을 써서 기운이 빠져 건강을 해치는 수도 생기니 조심하되, 일상중에 참선이든 염불이든 수행하는 것을 생활화해야 한다.
 
  요컨대, 우리는 육바라밀의 하나인 선정(禪定)을 통해서 삿되고망령된 마음이나 분별에서 나온 모든 번뇌를 쉬어버리고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킴으로써, 마음이 번뇌 망상에 물들지 아니하고 또렷하게 안정된 가운데서 비로소 지혜(智慧)가 생겨나게 됨이니 오랜 수행과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번 선정(禪定)에 들면 한번 부처님 나라에 드는 것이요, 하루 선정에 들면 하루 부처님 나라에 드는 것과 같다. 우리 모두가 염불기도하는 마음으로,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우주와 합일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6. 지혜(智慧) 바라밀
 
  육바라밀의 지혜(智慧)는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통상 반야(般若)라고도 하는 것인데, 반야는 인도어의 프라즈냐아(prajna)의 음사(音寫)이며, 그 의미는 지혜(智慧)이다. 지(智) 또는 혜(慧)만으로도 번역되기도 한다. 이것은 모든 존재의 참 모습을 보고 그 성품이 공(空)함을 비추어 아는 능력이다. 즉, 일을 잘 살피어 잘못되어지는 일이 없이 실천하도록 하는 작용이다.
 
우리는 지혜가 있음으로써 올바르게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등을 펼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지혜롭지 못한 보시는 그릇되는 수가 있고, 지혜롭지 못한 지계는 하나를 지키려다 백을 잃어버릴 수 있는 우(愚)를 범할 수 있으며 지혜로운 인욕이랴말로 자연스럽고 지혜롭지 못한 정진은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며, 지혜로운 선정만이 항마로부터 우리를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지혜(智慧)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을 더욱 값지게 만들어주는 요소이다. 그러므로 지혜있는 자만이 다른 바라밀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인간이 보이지 않는 어떤 거대한 힘에 의지하기만 하여 나약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우리 스스로 갖추고 있는 위한 능력을 개발하고 창조하는 지혜를 얻어서 행복한 인생을 살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지혜를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되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45년동안 부처님의 모든 설법은 사실 우리를 지혜롭게 만들기 위한 것이므로, 우리는 부처님께서 몸소 깨달으신 진리의 가르침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지혜(智慧)를 얻을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는 사람은 모르는 이보다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을 남겨주시어, 불교에 입문한자가 대각(大覺)을 성취할 때까지 일생을 수행하며 공부하도록 하셨다.
 
육바라밀을 삼학에 견주어본다면, 사실 우리는 지계(持戒) 바라밀에서 계(戒)에 관한 내용을, 선정(禪定) 바라밀에서 정(定)에 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배운 것이다. 세 번째 혜(慧)는 육바라밀의 지혜(智慧)와 비슷한 성질의 것으로서, 계(戒)와 정(定)이 잘 이루어지면 혜(慧)는 저절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육바라밀의 지계(持戒)와 선정(禪定)을 통해 지혜(智慧)를 얻는데 도움받을 수 있다. 즉, 육바라밀의 구성요소들은 서로 보완관계를 가지면서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지혜바라밀도 다른 바라밀들을 끊임없이 실천해봄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혜(智慧)는 결코 이기적이거나 독선적이지 않은 불교의 이타(利他)정신을 바탕으로 한 자비이며 수승한 지혜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앞에서 배운 팔정도(八正道)도 바로 지혜를 얻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이다.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은 계(戒)에 속하고, 정념(正念), 정정(正定)은 정(定)에 속하며,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정진(正精進)은 혜(慧)에 속한다. 또한 혜(慧)는 계(戒)와 정(定)을 올바로 행하는데 필요한 것이니, 결국 혜(慧)가 팔정도를 총괄하는 격이 되어 혜(慧)와 도(道)는 같은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혜(智慧)를 얻는 길이요 방법인 것이다. 이와 같이 삼학 또는 육바라밀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궁극적으로 반야(般若)를 얻게 된다.
 
반야(般若)는 마음을 비움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무분별의 지혜이며, 공(空)한 지혜이고, 나아가서는 공(空)에 대한 집착마저도 초월한 반야일심(般若一心)의 진여(眞如)함에 이르는 궁극의 지혜이다. 그래서 삼학과 육바라밀의 궁극적인 목표도 다름 아닌 반야(般若)를 얻기 위한 실천인 것이다.
 
그런데 지혜를 터득하여 모든 것이 무상이요 공(空)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자문해 보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아직 진정한 해탈을 얻은 것이라고말할 수 없을는지 모른다. 산다는 것은 인연 맺는 것이다.
 
좋은 인연이 맺어지면 다행인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참고 정진해서 이를 잘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지혜롭지 못해서 그렇게 하지 못했으면 반드시 후회하게 되는 법이다. 반야선(般若船)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지혜(智慧)의 배이다. 우리도 지혜(智慧)를 잘 쓰다보면 저도 모르게 반야선을 타고 고통의 바다를 훌쩍 건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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