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찰(법주사,표충사,대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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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찰(법주사,표충사,대흥사)

마이템플 0 3006
속리산 법주사

1.  우리민족에게 있어 불교란 단순히 종교 이상의 깊이를 갖고 있다. 서역만리나 떨어진 곳에서부터 전래된 불교가 중국이란 나라를 통해 한 번 여과되어져 우리에게 전래되면서 아무래도 본래의 모습 그대로일 수는 엇었다.
 
그 깊이란 것이 받아들이는 우리민족의 역량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러한 전래는 다시 우리민족의 기본적 정신 위에 불교라는 색깔 다른 사상이 습합되어져 우리만의 사상으로 발전시켜져 왔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불교란 말을 쓸 수 있는고 민족의식의 흐름 속에서 불교의 역할을 조명하기도 하는 것이다.
 
한국의 사찰순례는 이런 이유로 단순한 불교와의 만남 이외에 유․불․선의 다양한 사상과 우리고유의 토착신앙가지를 섭렵할 수 있는 무한의 흥미로움을 전해준다. 그 뿐인가. 우리의 먼 조상들이 사찰 하나를 조성하기 위한 심미안의 세계가 가슴으로 전달되는 현장이기도 한 것이다.
 
사려깊은 애정으로 경내를 들어선 이는 풀 한포기 돌 하나가 그저 놓여진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무모한 일은 것 같은 일도 일관된 원력으로 장엄불사를 이루어 냈는가 하면 무심과 무욕의 평상심이 자연스러운 경내의 정원조성으로 나타내어 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곳에 필연적으로 따랐던 것은 눈푸른 선각자의 출현으로 인해 중생제도와 흩어진 사상의 가닥이 한 곳으로 매듭지어지는 일일 것이다. 또한 이렇게 매듭지어진 것을 가닥가닥 풀어서 그 연원을 살펴보는 일은 오늘의 우리가 할 일이다.

2.  속리산 법주사로의 첫 번째 관문은 이름하여 말티고개라는 해발 800여m의 고지를 아슬아슬하게 넘어서면서 시작된다.  고려 태조가 속리산에 행어(幸御)할 때 쓰기 위해 닦았다는 이 길은 법주사를 찾기 전에 경건한 마음을 갖고 하심(下心)할 수 있도록 해준다.
 
구절양장의 말티재를 넘고나면 수령(樹齡) 580년을 자랑하는 정이품 소나무가 행인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세조대왕의 법주사 행차 때 대왕이 탄 연(輦)이 무사히 지나갈 수 있도록 자신이 뻗어 놓은 가지를 번쩍 들었다 하여 받은 벼슬 정이품.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라면 이 정도의 여유와 멋은 지녀야 했다. 정이품의 소나무를 끼고 돌아나가면 속리산의 커다란 체격이 넉넉한 가슴을 펼쳐보인다.
 
속리산은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의 한 줄기로서 보은, 괴산, 상주 삼군(三郡)만 해도 여덟가지나 된다. 또한 산내에는 여덟 개의 석문이 있고 다시 문장대, 경업대 등 여덟 개의 대(台)와 여덟 봉우리가 길목 마다에서 수많은 얘깃거리를 남겨 재미롭다.
 
여기 고운(孤雲) 최치원선생이 헌강왕 12년(886년)에 속리산 묘덕암을 찾아와 산의 경치를 구경하고 남긴 시는 속리산을 한층 더 유명하게 해준다.
 
  道佛遠人 人遠道 (도불원인 인원도)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진리를 멀리하려 하는구나.
  山非鯉俗 俗離山 (산비리속 속리산)  산은 세속을 여의지 않았는데
                                    세속이 산을 여의려 하는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잔설이 남아 있던 오리숲에 이젠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전나무 소나무숲 사이를 봄기운이 오가며 훈기를 불어 넣는다. 이쯤 되면 아무리 무딘 감성을 가진 이라도 세조가 문장대에서 백일장의 즉흥을 읊게 했던 선비들과 어울려 그 긴장감을 맛보고 싶을게다.
 
삼국유사의 관동풍악발 연수석기에서는 속리산이란 산명을 얻게된 연유를 이렇게 들려준다. 속리산은 원래 구봉산(九峯山)이라 불리워 오다가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사의 고승인 진표(眞表)율사가 신라 혜공왕 2년(776년)에 미륵 장육상을 주조하여 봉안하고 금산사에서 지금의 속리산으로 향하여 가던 중 소달구지를 타고 가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달구지를 끌고 가던 소들이 율사를 보자 그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소 주인은 달구지에서 내려 스님에게 연유를 묻는다 “이 소들이 어째서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대체 스님은 누구란 말이오?”
 
 “나는 금산사의 진표라는 중인데 일찍이 변산(邊山)의 불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 미륵, 지장의 두 보살 앞에서 친히 계법(戒法)과 진성(眞性)을 받아 절을 짓고 오래 수도할 곳을 찾아서 오는 길입니다. 이 소들은 겉으로 어리석게 보일는지 모르나 속으로는 현명하게 내가 계법을 받은 것을 알고 불법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끓어 앉아 우는 것입니다”하고 답했다.
 
소 주인은 이 말을 듣고 나서 “짐승에게도 이러한 신앙심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에게 어찌 신앙심이 없겠는가?”하고 그 자리에서 낫을 들어 스스로 머리를 잘랐다. 율사는 그의 머리를 다시 곱게 깎아주고 계(戒)를 일러 주었다.
이제 함께 길을 떠나게 된 그들은 속리산 골짜기에 이르러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보고는 표시를 해두고 다시 명주(지금의 강릉)를 거쳐 금강산에 가서 발여사(鉢淵寺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진표율사로 인하여 소달구지를 여의고 입산한 곳이라 하여 얻은 이름이 속리산인 것이다.

3.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법주사의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부터 청동미륵대불상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정도로 웅대하다. 채1년이 되지 못한 청동미륵대불상이 법주사 경내의 유수한 문화재를 제치고 가장 주목 받는 바가 되어 있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과거에 비해 현재의 법주사 사세가 더욱 신장되었고, 그 원력 또한 지극함을 더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간 반가운 일이다. 남겨진 유물과 전수받은 사상에만 안주하지 않고 불법홍포를 위한 이와같은 노력과 원력이 더없이 귀하고 소중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법주사의 창건주는 의신(義信)조사다.
 
조사는 천축으로부터 법을 구하고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 곳에 처음으로 절을 이룩했다고 동국여지승람은 밝히고 있다.
 
다시 그 시기를 신라 24대 진흥왕 14년(553년)으로 의신화상이 백나(白騾)에 경을 싣고 와 주한 고로 법주사(法住寺)라 칭했다고 조선불교통사는 말한다. 그후 신라 33대 성덕왕 19c(720년)에 중건을 보았고 고려 태조 원년 무인에 증통국사의 중건이 한 차례 있었다.
 
다시 조선 세조대왕이 즉위 자신이 지은 업보를 위하여 참회하고 불연에 가피를 입고자 법주사에 행차하던 중 청주의 혜각존자, 신미학조, 학열 등 제사(諸師)로 하여금 산내 암자를 중수케하였고 기도법회를 열었던 복천선원은 더욱 일신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속리산은 의병의 본거지가 되었고 이로 인하여 왜병들은 법주사를 포함한 산내 암자 등을 일시에 전소시켜 버렸다. 그랬던 것이 양종팔도도총 섭의승대장 벽암스님에의 발원으로 현재의 당우를 중창 복원하였다.
 
 해탈의 산 속리산에 부처님의 명호를 간직한 아홉 봉우리를 이고 있는 법주사는 애초에 의신조사로부터 천년미륵신앙의 원천지로 그 부리를 내려왔다. 삼국유사의 진표율사에 대한 기록과 그에 의해 지어진 길상사(吉祥寺)와 법주사를 동일시할 아무런 근거를 갖고 있진 못하지만 본 속리에 있던 법주사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길상가람과 합쳐졌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면 진표율사가 속리산 골자기의 길상초를 보고 이곳이 무심한 곳이 아니었음을 감지, 영심법사에게 여기가 미륵용화대지임을 일러주어 길상사를 짓게 했던 것이니 양자는 법주사에 머문다는 그 법의 밑받침이 곧 미륵신앙이라는 이유가 된다.
 
미륵불은 법상종의 주존 부처님이시다. 그리하여 법주사는 진표율사가 개창한 금산사(金山寺)와 더불어 영심법사의 제자 심지(心地)가 열었다는 동화사(東華寺)와 함께 신라시대 중요한 법상종의 사찰로 여겨져 왔다.
 
백락천은 일생을 두고 법상종을 연구했지만 끝내 “뜻이 그윽하여 알기 어렵다”고 토론한 바 있다. 그러나 법상종은 미륵신앙의 구원론적 예언의 성질 덕분에 예부터 글 모르고 의지가 박약한 중생들에게 더 많은 친근감을 주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4.  미륵도량 법주사는 긴 세월 민족의 영락을 지켜보면서 자신에게까지 번져온 역사의 명암까지도 감수해내고 지금껏 건재한 미륵 자비광명으로 많은 중생을 안으로 보듬고 있다. 그래서 생겨난 많은 일화와 그윽한 속리산의 정기를 머금은 암자는 법주사보다 오히려 유명할는지 모른다.
 
법주사가 한창 융성했을 당시에는 승려 수가 삼천을 헤아렸으며 산내 암자 또한 이십여 군데나 되었음을 당시의 절터와 사적기는 알려준다. 그 암자 중 임진란을 거쳐 벽암 각성스님과 법주사와의 인연을 이어 큰절의 법당을 재창하고 그 암자까지 보수 창건하여 지금가지 보존하고 있는 암자는 복천암을 위시하여 다섯 군데가 불보살 현행도량으로 남아있다.
 
산내의 가장 큰 암자는 역시 복천암으로 십육나한님을 모신 나한전이 있고 거기서 오리쯤 구비능성을 따라 고갯길 너머에는 중사자암이 있다. 아스라한 벼랑 밑에 위치한 이 암자는 인조 때 어명으로 재창하여 나라와 왕실의 호국염원을 담았다.
 
법주사는 이렇듯 무리 없이 다양한 사상을 받아들이고, 많은 유물과 유적, 아기자기한 설화가 미륵신앙을 요체로 하여 지금까지의 발전을 이루어 왔음이다. 법주사 팔상전의 뜰을 미륵부처님은 그윽한 눈길로 내려다 보고 있다.
 
이제 겨우 1년 남짓한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예전부터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낯설지 않다. 청동미륵대불 회향식이 있던 날 하늘이 환하게 열리더니 오색서광이 하늘을 수놓고 백광이 치솟아 올랐다. 많은 불자들에게 환희심을 불러 일으키고, 신심을 배전시킨 이적이었던 것이다.
 

 
재약산 표충사

1.  며칠 사이에 개나리꽃이 활짝 피었다. 겨우내 나목으로 있으면서 밀생을 지속해나온 나무들이 날이 풀리자마자 파란 잎새를 달고 곁들여서 꽃망을 틔운다. 어느 사이엔가 얼어있던 땅이 풀리고 피어오르는 지애는 만산을 뒤덮는다.
 
언제라도 꼭 시간을 끊을 수 없는 시점에서 사람들이 느끼기도 전에 새잎이 돋아나고 꽃잎을 연다. 자연의 기운은 사람들의 교감보다 훨씬 앞서 변화를 가져온다. 모든 생물이 새로운 삶을 열기 위하여 약동하는 기운이 산천의 변화와 초목의 변모를 통해 빠른 속도로 우리의 의식 속으로 달려온다.
 
차창을 스치며 지나는 산곡에는 벌서 분홍빛 진달래 꽃잎이 나슬거린다. 밀양역에 내려서 한 이십분 가량 달려갔을 때, 진달래꽃이 불긋불긋 수놓인 산곡이 차창으로 달려 왔다. 산곡에 걸린 청람(淸嵐)은 어느덧 겨울의 산색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들에는 맑은 양광을 받으며 농부들의 일손이 분주했고, 아스팔트 큰길 가에 늘어서 있는 비닐하우스 속에는 키 큰 고추나무며 오이덩쿨이 여름을 연상케한다.
 
밀양은 고추재배단지로 이름이 높다. 강변에 나앉아 있는 영남루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그리고 아랑이라고 하는 규수의 모습도 떠오른다. 정절을 생명처럼 귀중하게 생각했던 아랑. 옛날이나 오늘이나 사람이 지닌 욕망이 제일 무서운 요소이고, 이 무서운 것을 서로서로 느끼고 또 그 무서운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내용으로 피어나 문화를 이루어 나가는 동력이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재약산구를 향했다.
 
달리던 자동차는 분홍빛 진달래꽃이 나슬거리던 작은 산기슭을 돌고 고추재배단지가 있는 들을 가로질러 더 이상 달려갈 수 없는 산곡(山谷)에 다달았다.그곳이 재약산 입구였다. 차에서 내리자 길가에 좌판을 놓고 더덕을 파는 한 촌노의 목소리가 길손을 맞았다. “손님예, 향내 좋은 이 산더덕 사가이소예.”노인의 음성치고는 카랑하다 싶은 목소리가 어깨를 넘어왔다.
 
  야단스러운 현대문명과 별 교류없이 유현한 산곡에서, 우리의 조상들이 가장 귀중하게 생각했던 관례, 혼례, 상례, 제례 같은 등등의 예를 소중한 가치로 높이 받들며 삶을 이어나온, 조금은 고풍스럽고 다소는 반문명적인 산골 노파의 카랑한 목소리가 이날따라 청량제처럼 길손의 마음을 흔들고 지나갔다.

2.  재약산(載藥山)은 바로 산구 위에 독수리처럼 날개를 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계곡을 건너는 사람을 앞부리로 찍어서 단숨에 넘어뜨릴 듯이 날카로우면서도 장중한 산세(山勢)로 길손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름이 넘는 상수리나무가 길 한옆으로 도열해 있었으며, 이름을 알 수 없는 잡목들도 그 수령만은 몇 백년을 상회하는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사명선사 호국영지 표충사’라고 쓰인 플랜카드가 입구에 걸려 흔들리고 있었다. 표충사는 몇 해 전에 보았던, 퇴락해가는 사찰의 면모가 아니었다.
 
서산, 사명 등 영정을 모신 전각과 유물관의 모습이 깨끗하게 새로 단장된 것이었다. 경내지도 말끔하게 조경이 되어 있었다.  경상남도 밀양군 단장면 구천리에 자리잡고 앉은 표충사는 고려조에만 해도 대단한 사찰이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一然)스님이 표충사에 주석하며 삼국유사의 완간을 위해 정진할 때만 해도 1천여 대중이 총림을 이루며 살았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되었는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 이후에도 전국 사찰의 규정을 담당할 정도로 사세가 컸으며, 조선 선조 이후에는 동방제일선찰(東方第一禪刹)로서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 이 표충사에 주석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 표충사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던가에 대해서 넉넉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표충사가 세워지기는 신라 태종 무열왕 원년인 654년의 일이다. 진덕여왕이 태종무열왕에게 왕권을 넘긴 해이므로 진덕여왕 8년이 되기도 한다. 이때의 절 이름은 죽림사(竹林寺)였다고 한다. 지금도 죽림사라고 할만큼 청정한 대나무숲이 법당 뒤에 무성하다. 그러다가 흥덕왕(興德王) 4년에는 인도스님 한분이 부처님 진신사리를 가지고 이 죽림사에 들어와서 부처님 사리를 봉안할 삼층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후 조선조 숙종 때 탄영(坦永)과 도한(道閑)이 중창했으며, 헌종 10년 사명대사의 충훈을 추모하고자 사당을 이 곳에 건립하고부터 표충사라고 개명했다 한다. 그러나 헌종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명대사의 충훈에 대한 우리 국민의 생각도 미미했고 또 그 분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자 하는 국가의 의지도 미미하여, 표충사에 대한 국민적 의식은 극히 쇄잔한 내용이었다. 이순신 장군에 비하여 결코 떨어지지 않는 위업을 남겼지만, 사명대사에 관한 국민적 의식은 아주 미미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여기서 사명대사의 업적을 한번 상고해 볼 필요를 느낀다. 선조 25년, 그러니까 임진년 4월,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이 풍신수길의 독전으로 침략의 손길을 뻗쳐 왔을 때, 이율곡의 양병설을 무시했던 조정은 마치 풍전등화와 같은 지경에 처했다.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신했으며, 왜군은 서울과 평양을 점령, 전 강토는 왜놈들의 말발굽에 유전되었다.
 
이 때 사명대사는 분연히 몸을 떨치고 일어나 승군을 지휘, 평양을 탈환, 풍전등화와 같은 위난에 처해 있던 나라를 건졌다. 사명대사는 7년 동안 팔도도총섭의 승군대장의 직책을 맡아 수십만석의 군량을 비축하고 산성을 재건하여 나라의 기틀을 바로 잡았으며, 정유년에는 선조의 특사로 일본에 건너가 덕천가강과 향후 3백년간 재침이 없도록 강화조약을 맺고 귀국하는 길에 4천여명이 넘는 우리 동포를 송환해 오기도 했다.
 
선조는 이와 같은 사명대사의 위업을 기리고자 정 2품 자헌대부증추부사 형조판서 의금부사를 재수했으며, 갑진년에 들어서는 영의정의 직책가지 재수했으나 이를 사양한 사명대사는 본분사를 위해 가야산으로 돌아가 수행의 나날을 보냈다. 사명대사는 가야산에서 소요자재하는 삶을 살다가 67세에 입적했다.

3.   잊혀져 가고 묻혀 가던 표충사가 새로운 면모로 단장을 하고, 사명대사의 충혼의 듯을 기리고자 하여 표충사 복원불사를 일으킨 이지은 스님에 의해서 다시 태어나는 경이를 맞고 있다. 1984년에 표충사 주지로 부임한 이지은스님은 ‘사명선사 호국성지 표충사 복원불사’를 추진, 10년이라는 장구한 기간동안 줄기차게 불사를 진행할 계획을 세우고 금년까지 7년 동안 23억원이나 되는 정재를 투입, 21동에 달하는 당우와 전각을 복원하여 세인의 눈을 크게 열었다.
 
이지은스님은 교계에 명망이 널리 알려진 스님도 아니요, 흔한 중앙종회의원이라는 이름 하나 걸고 있는 스님도 아니다.그런데 84년에 이 표충사에 주지로 부임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누가 알아주거나 말거나 묵묵히 표충사 복원불사를 단신으로 추진, 14억여원에 달하는 공사비를 마련, 대대적인 성역화작업을 지속해 나왔다.
 
경내에 산재해 있는 팔상전, 대광전, 원통저, 사천왕문, 삼청각, 강원공야실, 우화루, 수충루, 사당, 유물관, 서래각, 서원, 종루 등 무려 21동에 이르는 건물을 개축하고 보수했다. 그동안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은 것은 9억여원이었고, 나머지 13억여원은 표충사 현 주지인 이지은스님의 원력과 동참재자들의 시은으로 충당되었다.
 
표충사를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고자 하는 뜻은 우선 사명대사의 위업을 오늘에 기리고 동시에 우리국민들이 잊어가고 있는 우리 민족의 자주적 의지와 민족혼을 일으키고자 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자라나는 이 나라의 새싹들에게 자주적인 의지와 민족혼을 불어넣어 건강한 국민, 올바른 사고와 판단력을 지니고 있는 국민으로 그 정신을 승화시킬 수 있는 도량으로 만들어 보기 위해서이다.
 
“사림이 자기의 한 생애를 걸고 매진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원효스님처럼 깊은 사상체계를 정립하여 사람들의 정신을 높이는 길도 있을 것이며, 사명스님처럼 용기와 기백을 가지고 당당하게 적과 맞서서 파사현정을 해나감으로써 정의가 살아 숨쉬는 살기 좋은 땅을 이룩하는 길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역시 이 한 몸을 바쳐서라도 이 표충사 성역화를 완결해보고 싶습니다..”
 
이지은스님의 의지는 대단하다. 무려 8년동안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입장에서 묵묵히 대작불사를 추진시켜 나왔다. 이제 남은 불사는 의중당, 규정소, 예제실, 일주문, 장판각, 표충비각, 효몽대사부도, 산문, 홍살문, 충혼탑, 대웅전, 영각상, 노전, 응진전, 선원, 삼층석탑봇, 금당만일루, 단월당, 사적비 등 20여 동에 달하는 당우와 전각의 개수이다.
 
표충사 복원불사가 모두 끝나면 9천7백40평의 대지 위에 51동의 당우와 전각이 들어서 참으로 은성한 대가람이 모습을 갖는다. 지금 현재는 32동에 달하는 전각과 당우를 보수하거나 축소했다. 불사의 마무리를 93년으로 잡고 매일 같이 토목공사를 하고 못질을 하고 기둥을 일으켜 세운다. 전각 한 채, 당우 한 동을 신축하기도 어려운 일인데 20여동이나 되는 건물을 일으켜 세우는데는 적지 않은 경비가 있어야 할 것이다.
 
나머지 불사에 소요될 경비를 대략 39억원으로 잡고 있는데 어려움이 한 두가지가 아니라고 한다. 불사가 끝나면 청소년 수련장을 통해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정신승화를 위한 수련이나 교육에 많은 노력을 쏟을 것이라고 한다.
 
재약산을 바로 머리위에 이고 앉아 있는 표충사. 표충사가 사명성사 호국성지 복원사업 10개 년 계획을 가시화하여 우리의 눈앞에 완전히 펼쳐 놓은 날, 지금의 표충사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불사의 현장에서 일을 주선해 나가는 주역들은 남이 알 수 없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전국에 있는 불교도들의 관심이 이런 일에 모아졌으면 싶다.
 

 
두륜산 대흥사

1.  반도의 최남단 해남에서는 마치 봄으로 인한 열병이라도 치루고 있는 듯 보였다. 매서운 바람으로부터 풀려난 해방감에 모든 자연은 긴장을 풀어 마냥 나른하게만 느껴진다. 따스한 햇살이 세포 하나하나의 간격을 벌려서 마음껏 자연을 호흡하게 해주고 간혹 불어오는 싱그런 봄내음은 사람의 감성을 마구 흔들어 놓는 그런 길이 언제가지라도 이어질 듯 대흥사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
 
인적이 많은 것도 아니다. 자연은 스스로의 성장을 위해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준비하고 있어서일까. 좀처럼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남의 봄기운은 이렇듯 침묵이 흐르는 파문 속에서 각자의 성장을 위해 내면을 살펴야만 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런 속에서는 단지 의식의 흐름만을 포착할 수 있을 뿐이다. 의식 외에 또 다른 움직임을 찾는 노력은 인간이 지닌 어쩔 수 없는 그리움. 이러한 그리움의 극복은 곧 바로 자신의 내면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해결되어지는 것이리라.
 
의식 저편에 일단 묻어두었던 의문점들이 하나 둘 망령처럼 고개를 들고 일어서서는 자신의 경험과 간접경험을 총동원해 보는 작업이 시작되고, 이것은 곧 자신이 이전에 경험했던 법주를 넘어선 새로운 의식작용을 도출해 내는 기쁨을 맛보게 해준다. 지식 아닌 지혜의 탄생이며 일련의 삼매에서 얻어진 즐거움이다. 새봄을 맞으면서 이만한 깨달음 하나 얻지 못한다면 이 봄은 그저 지나쳐가는 무의미한 시간의 편린에 불과할 뿐이다.

2.  목적지 대흥사를 향하여 남으로 계속된 발길이 잠시 머문 곳은 윤고산 유적지다. 고산의 고택인 녹우당이 조상의 숨결을 느껴보고자 하는 이들을 맞아들여 아련한 향수를 전해준다. 아담한 뜰과 녹우당을 둘러싼 뒷동산에는 고산 선생부터 대를 이어 심고 가구어온 비자나무숲과 동백보리밥나무, 남오미나, 참식 등의 상록수가 바람과의 유희를 즐기고, 향긋한 춘란이 핀 안뜰에 서면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즉흥의 멋을 즐기는 정철에 반해 작흥의 윤선도는 흔히 두보와 비교해 평가하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고, 해남의 두륜산 아랫자락에서 즐겼을 고산의 풍류를 비로소 이 곳에 와서야 가슴으로 전해지는 감상만은 녹우당에 잠시라도 머물러 본이의 차지다.
 
기어이 떨치고 가야만 하는 대흥사로의 10리 가까운 숲길은 의식과는 무관하게 빨려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 황홀하기까지하다. 이러한 대흥사의 입구는 쌍계사 입구, 해인사 입구와 더불어 절경을 자랑한 지 오래다.
 
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흥사는 소백산의 정기를 이은 두륜산(頭輪山) 자락에 오랜 세월 굳건한 지킴을 해온 내력을 차곡차곡 쓸어안고 있는 곳이다. 서쪽으로 진도를, 동쪽으로 강진을 접한 이곳 해남에는 대둔산(大芚山)을 중심으로 대흥사 외에도 석두암, 흑석사, 금강사, 다보사 등 숱한 사암들이 자리한 불교동네. 대둔산은 옛날 ‘대듬’ 또는 ‘한듬’으로 불리었다. 그래서 이전의 대흥사는 ‘대둔사’ 또는 ‘한듬절’로 불리기도 했었다.
 
대둔산이 지금의 두륜산으로 불리게 된 경위를 고기(古記)에서는 이렇게 밝혔다. 중국 곤륜산맥의 줄기가 동쪽으로 흘러 백두산을 이루고 이 곳 해남에 이르러 그 줄기가 다했는데 곤륜의 ‘륜’과 백두의 ‘두’를 따서 두륜산(頭崙山)으로 불리다가 언제부터인가 두륜(頭輪)으로 표기되고 있는 것이다.
 
피안교를 지나 ‘두륜산 대흥사’의 편액이 걸린 천왕문을 지나고 나면 비전(碑殿)이 오른쪽으로 도열해 있다. 대흥사는 예부터 많은 구도자들의 귀의처였다. 그리하여 수려한 두륜산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해 냈던 것이니 열 세분의 대종사와 열 세분의 대강사가 그러하다.
 
비전은 이들 13대종사를 위시한 고승들의 사리를 안치한 곳이다. 대흥사의 중흥조 청허당 서산대사의 문도 중 13대종사의 배출은 송광사의 16국사로 인한 승보사찰의 화려함에 가려져 있지만 청허당의 임제종 선풍을 배불의 열악한 조건 속에서 계승해준 점에 있어 매우 뜻 깊은 일인 것이다.
 
풍담, 취여, 월저, 화옥, 설암, 환성, 벽하, 설봉, 상월, 호암, 함월, 연담, 초의대종사로 이어진 찬연한 법맥 중 시선다(詩禪茶)경지가 한데 어우러져 추사, 소치와 함께 해남 3절을 이룬 초의선사(1786~1866)는 대흥사의 선실에서 누렸을 높깊은 풍류로 인해 가장 세인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던 것이다.
 
스님은 불교 뿐 아니라 유교 도교 등 제분야에 있어 능통하여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홍현주 등 유학의 대가들과도 폭넓은 교류가 있었던 바 한 시대를 풍미한 그의 사상은 곧 다도에 응축되어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 차의 역사는 신라 선덕왕 때로 거슬러 오른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호남과 영남이 차의 본고장이 되어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발전되어 왔던 것이다.
 
대흥사의 안쪽 묵향 가득한 방에 계시는 스님 한 분은 초의선사의 다도를 이렇게 설명해 주셨다.
 
  “차에 색과 향과 미가 있듯 사람도 이 셋을 고루 갖추어야 합니다. 사람의 골격을 이루는 지조는 색이요, 본래의 성품을 발현시켜 덕을 갖춤은 향기를 지닌 사람이고, 풍습과 유행을 고루 갖춘 멋을 지닌 사람은 미를 겸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차가 되려면 색향미를 빠짐없이 갖추어야 하듯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님의 말씀이 방안의 묵향과 어우러져 선문답이라도 할 수 있을 듯 정신이 삽상해진다.

3.  대흥사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것으로 「죽미기」「만일암기」「북암기」등이 있었다 한다. 이러한 고 기록들을 종합하여 수룡과 초의가 편집한 「대암사지」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현존하는 가장 상세한 대흥사지라고 할 수 있다.
 
초의에 의해 비교적 충실히 기록되고 오류까지 지적된 대둔사지와 대동여지승람이 대둔산조에서 언급된 것을 종합해 보면, 아암화상의 주장대로 신라말기를 대흥사의 창건 시기로 추정하고 있다.
 
불투명한 창건 연대와 마찬가지로 몇 가지의 오류를 안은 채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도 하고 도선국사 또는 정관대사가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질 뿐이다. 이렇듯 창건의 신비로운 대흥사는 무염지의 아담한 연못에 이르자 대웅전을 위시한 일곽과 천분의 부처님을 모신 천불전, 서산대사의 영정을 모신 표충사 그리고 초의선사가 거처하던 대광명전의 네 부분으로 갈라진다.
 
대웅전 앞 침계루에는 두륜산의 맑은 계곡물이 이 곳을 찾은 많은 신도들의 갖가지 염원을 담고 다리를 돌아 흘러 내리고 있었다.대웅보전의 편액은 본래 추사선생이 귀양길에 잠시 들러 초의선사를 만나고 서준 것이었다고 한다. 그 후 제주도 귀양이 풀려 다시 뱃길로 돌아오는 길에 웬일인지 자기가 쓴 것을 떼게하고 광사(匡師)의 편액을 걸게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앞 자장율사가 가져온 사리를 봉안했다는 사리탑을 돌아 나와 이른 천불전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하나 전해진다.
 
이는 풍계대종사가 쓴 『일본표해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전내(殿內)에 봉안된 천불은 모두가 경주에서 생산된 옥으로 조성한 부처님이었다 한다. 열사람이 6년여에 걸쳐 완성한 불상을 3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대흥사로 오던 중 1척의 배가 풍랑에 표류하여 일본에 닿게 되었고, 이를 발견한 일인들이 옥불을 만나 기쁜 마음으로 절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려 했다.
 
그러나 일인(日人)들의 꿈에 이 불상들이 나타나 “우리들은 조선국 해남의 대흥사로 가는 중이니 이 곳에 봉안될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일인들은 옥불을 해남으로 돌려보냈고 대흥사는 천분의 부처님을 모두 무사히 봉안할 수 있었다 한다. 또 하나 천불전 앞 초의선사가 심었다는 영산홍과 자산홍은 백년이 훨씬 넘은 수령으로 초의선사의 자취를 후인에게 아름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  조선시대 억불숭유 정책으로 인한 억압과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불교 자체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진 논쟁거리 교․선에 대한 대립은 내우외환의 불교존속 위기였다.
 
그런 가운데 출현한 서산대사는 왜구의 침입에 노구의 몸을 이끌고 막아낸 호국불교의 표상으로나,선교의 대립을 합일한 뚜렷한 족적으로 한국불교의 인맥에서 백두산 봉우리 만큼 우뚝 서 있는 존재로 인지되어져 왔다. 스님은 문정왕후에 의해 부활된 제1회 승과에서 중선과에 합격 대선을 거쳐 선교양종찰사의 자리에까지 올랐었다. 37세의 나이에 접어들어 판사의직이 선승의 본분이 아님을 통감하여 운수납자의 길을 떠난 그는 후학들에게 친절한 가르침을 베풀었고, 선조22년 역모의 죄를 뒤집어 썼다가 임금의 현명한 판단으로 석방되기도 했다. 왜구의 침입에 전국의 각 사찰에 격문을 돌려 궐기할 것을 명한 서산.
 
격문 하나에 전국의 승려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할 수 있었던 스님의 탁월성과 선교합일의 사상은 안팎으로 어려운 시기의 불교를 건져냈던 것이다.그런 서산이 입적을 앞두고 자신의 의발을 대둔산에 전할 것을 부촉하였다. 서산은 두륜산이 항상 기화이초(奇花異草)로 아름답고 북으로는 월출산이 있고 남으로 달마산, 동서로 천관산과 선은산이 솟아있고, 바다와 산이 둘러싸 지키며, 골짜기는 깊고 그윽하니, 이곳은 만세토록 불훼의 땅이 되리라 예언하였던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백85년이 지난 후 그의 7세손 천점이 사당을 짓고 화상을 모시기 위해 임금께 진정을 올리고, 호조판서 서유린의 진언으로 정조가 표충이라는 사액을 내렸으며, 해마다 예조의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했던 영광을 누렸다. 이러한 서산의 공덕은 이조의 배불정책 속에서도 유일하게 불교를 발전시킨 곳이 되었고, 이는 13대종사와 13대강사를 배출, 오늘의 대흥사를 이끌어 왔다.
 
현재의 대흥사는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구성되어진 성역화작업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다. 불교라는 종교를 떠나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인 서산대사와 사명 그리고 처영의 진영이 모셔진 대흥사를 성지화시켜 자라나는 조국의 젊은이들에게 흔들림없는 민족정신을 심어 주자는 것이 그 취지다.
 
대흥사는 그간의 약간 있던 불협화음을 이제 말끔히 씻어내고, 성보문화(聖寶文化)를 보존한 천년고찰로서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현주지 도성스님과 대흥사 성역화사업에 앞장선 원학스님 등을 맞이해 그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정원조성까지도 손수 힘을 기울이는 노령의 도성스님의 모습에서 대흥사의 미래를 점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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