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찰(기림사,부석사,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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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찰(기림사,부석사,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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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월산 기림사
 
우리 한국의 사찰은 도량마다 한결같이 널찍한 가슴으로 ant 중생을 포근히 감싸안아 이 성지를 밟는 모든 사람을 편안함과 따스함 속으로 빠져들게 하여 이 땅에서 뿌리를 묻고 살아온 일체중생이라면 남녀노소를 구별하지 않고 어머니와 같은 포근함을 느끼게 한다. 이것이 곧 한국 사찰의 매력이요, 1천6백년의 장구한 세월을 말없이 중생구제와 호국의 일념으로 견지해 오고 있음에 불교를 입에 담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서양에서 들어온 각종 이교(異敎)에 물든 사람에게까지도 불교이 신성함은 불가침의 영역으로 존속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경북 경주군에 소재한 기림사를 찾는다면 더욱 뜻깊은 참배가 되리라 생각한다.
경주군 양북면 호암리, 속칭 범바위골 깊숙한 함월산 동족에 지장대찰 기림사는 이 나라 민족과 함께 자리하여 1천3백여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풍진을 마다하지 않고 사부대중을 제접하고 있는데 이 기림사(祇林寺)라는 사명(寺名)이 내려지기 이전에 연대를 측정하기 어려운 까마득한 옛날옛적에 천축의 사문, 광유화상이 부처님의 도량(道場)을 마련하여 임정사로 명명, 5백제자를 교화했다는 설화가 전해져 우리나라 설화문학의 소중한 자료를 제공하는 사찰하기도 하다.
 
그후 선덕영왕 12년(서기6백43년)에 원효대사가 도량을 확장하고 종전의 임정사에서 지금의 기림사로 사명을 개칭했다는데 삼국유사에도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동해에서 화룡의 선왕인 문무왕으로부터 만파식적이란 피리를 얻어 가지고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림사 부근에서 잠시 쉬어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최소한 통일신라 초기인 신문왕 이전부터 있어왔던 고찰임을 알게 한다.
 
또한 사적기에 살펴보면 ‘조선왕조때 경주부윤 김광묵이 사재를 털어 중수했으며 철종14년(1863년)에 큰 불이 나 1백13칸의 건물이 소실됐다’는 기록이 현존하는 이 대찰은 경주시에서 동쪽의 감포 쪽으로 50일쯤 동진하다가 양북면 소재지인 어일 조금 못미쳐 안동이라는 마을에 닿는다. 이 마을에서 불쪽으로 매끄럽게 포장된 도로를 다라 6km쯤 북진하면 참배객을 맞는 첫 번째 관문은 널찍한 마당에 궁궐의 담장 모양과 함께 철문 옆쪽의 매표소를 만나게 된다. 이 곳을 지나 5백여m를 오르며 대․소 16동에 달하는 대찰, 기림사를 만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찰 거의가 산중에 자리하여 그 가람의 법당이나 요사채는 한결같이 층계를 이루는데 비하여 이 기림사는 정전(正殿)인 대적광전이 제일 낮은 곳에 자리하여 대조를 이루는데 보편적으로 산자락에 위치한지라 북에는 함월천이 흐르고 남에는 도로와 개활지가 있으며 서와 동이 함월산 준령으로 숲을 이루는, 마치 농지(農地)의 일부처럼 비녕을 이루지 않음이 여느 고찰과 틀리는 점인데 2~3개 동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철종14년 화재 후 고종15년(1878년)에 경주부윤 송정화에 의해 중창된 건물들이며 법당과 요사채가 각각 별개의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본전인 대적광전은 정면 5간에 측면2간의 맞배지붕으로 형성된데 뒤이어 응진전, 약사전, 진남루, 석탑 등이 옹기종기 이웃을 이루고 한단 더 높은 곳에 종각과 관음전, 삼성각, 지장전과 요사채 그리고 현재 신축중인 삼천불전, 박물관 건물2동이 조화를 이루며 조선시대에는 31본산 중 11교구 본사로서 경북 동남지구의 사암을 장리하던 위용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웅장한 함월산의 산세는 영구음수(靈龜飮水)의 형국으로 최대길지라 전하며 현존 가람배치 역시 사적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정좌하였고, 국가 보물 제833호로 지정된 대적광전은 다포식 건물로 외관은 본전건물다운 웅건함을 갖추었으며 넓고 화려하여 장엄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이 본전에 모셔진 소조비로자나삼존불상은 보물 제958호로 지정되어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는데 중앙에 비로자나불, 좌우에 각각 노사나불과 석가불이 협시를 이루고 있으며 국보에 가까운 복장물까지 최근에 나온 바 있는 비로자나불상은 외무 당당하고 몸체 풍만하여 조성 당시의 불교의 위세를 감히 짐작케 하면서, 고려말과 조선시대 초기의 양식적 특징을 정감있게 표출하고 있다.
 
또한 장대한 상체에 비하여 결가부좌한 하체의 폭은 넓으나 높이가 낮은 편이며 통견한 법의는 두텁고 옷자락의 주름은 날카롭고 정교하게 세웠다. 상의는 배 부위에서 따라 묶어 상단의 깃을 주름잡히게 나타내었는데 이와같은 옷주름 처리법은 15세기 불상에서 이미 보여왔던 것으로 본전의 삼존불상은 전반적인 양식상의 특징에서 15세기 후반이나 16세기 전반기의 불상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대적광전 바로 앞에 세워진 삼층석탑은 경북 유형문화재 제205호로 지정, 통일신라의 일반형 석탑양식을 따른 비교적 완전한 석탑인데 현재 삼층기단은 갑석 모두가 남아있고 상대 중석에는 모서리 기둥과 탱주 한 개씩을 모각하고 있으며 그 위에 놓여있는 상대갑석의 일면에는 부연이 있고 또한 갑석 상면에는 4단의 층급 받침이 있으며 현재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 앙화가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는 통일신라말기의 석탑이다.
 
오는 6월 중에 준공을 보게 될 박물관에 모시고자 소중히 봉안중인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은 매우 희소하게 남아있는 국보급 보물로 조각 수법이 특이하고 조성연대 또한 명확한데 타래머리를 한 위에 보관을 따로 만들어 얹었고 목에는 삼도가 없으며 둥글고 풍만한 안광과 편안한 자세로 보아 관음보살임을 즉시 알게 한다. 복부의 큼직한 띠매듭과 가슴에 걸려있는 세가닥의 영락띠는 조선시대 목불의 특징을 보여주어 예술적 가치로 절찬을 받고 있는데 조성연대는 하대 상면에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해 연산군 7년으로 판명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종이로 제조하여 개금을 한 불상이라는 데서 현재 보물 제 415호로 지정, 보호를 하고 있다.
 
이밖에도 도유형문화재 제214호로 지정된 응진전을 비롯, 곳곳의 건물터와 임진왜란시 이 조국을 왜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승군을 모아 그 지휘본부로 사용했던 진남루가 자리하여 한 때는 본산으로서 많은 말사를 거느린 대찰답게 역사 및 예술성을 함께 하여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본전으로부터 3백m 남쪽에 위치한 산내 암자인 남암은 울창한 숲에 싸여있어 수도정진의 최적지로 불경소리 낭랑하고 본전뒤로 5백m에 자리한 북암에는 지난해에 5명의 수행납자가 7년 묵언수행을 회향하였고 현재 4명의 사문이 3년 묵언 결사에 들어가 벌써 1년 2개월을 경과한 가운데 상구보리하고 하화 중생하는 승가 본연의 수행을 견지하여 산내 암자에서는 최고의 수행으로 용맹정진하고 있으며 본전인 기림사에서는 포교와 가람 확장불사로 불교의 위상정립에 영일(寧日)없는 부처님의 시봉을 체득하여 성불의 대과를 이루고자 노력한다.
 
 이 기림사에서 뺄 수 없는 것은 불교와 물, 수행과 음다(飮茶)의 상관관계로 보아 오체를 맑게 하는 오종수가 그것인데 경내외에 감로수, 화정수, 장군수, 안명수, 오탁수가 자리하므로 차의 맛이 으뜸이고, 마음이 편안하며, 기골이 장대해지고, 눈이 밝아지며, 물이 좋아 까마귀까지 쪼았다는 다섯 종류의 우물과 우물터가 있어 광유화상이 사명을 임정사라 하여 좋은 물을 상징, 대찰을 이룩한 흔적 또한 역력하다.
 
신라 당시의 명산인 토함산과 함월산의 두 산은 토함산이 동해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먹었다, 토했다 하는 형국의 명산으로 호국의 대찰 불국사와 석굴암을 이 산 기슭에 건립, 충․효․예로써 국가와 부모와 개인을 위한 수행에 정진하였다면 달을 먹었다, 토했다 한다는 함월산의 기슭에 기림사를 세워 정중동으로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을 꾀했다는 점은 불교의 상대성원리와 유교의 음양을 뜻하는 내용으로 지리나 풍수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불국사와 기림사의 불가분의 관계는 너무도 밀접하여 그 뜻하는 바 조상의 슬기에 오로지 감응할 뿐”이라고 경탄한다.
 
  또한 사찰에서 동쪽으로 1.8km 지점에 위치한 동해의 바닷물속에 문무대왕의 수중릉에 있는데 아들인 신문왕이 부왕을 위하여 지었다는 사적 제31호의 감은사지 금당 밑에는 지금도 문무왕이 왜구로부터 국토를 지키기 위해 대룡(大龍)이 되어 땅밑 수중 굴 속으로 감은사를 왕래한다는 전설이 맥맥히 흐르고 있는 가운데 국보 제112호로 지정된 감은사지 삼층석탑 2기가 호국불교의 역사와 풍요로웠던 불교분화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신문왕이 부왕 문무왕의 화룡으로부터 만파식적과 옥대를 얻었다는 이견대가 있어 호국의 성지로 불교수행과 맥락을 함께 하고 있다.
 
8․15 해방과 함께 교통과 통신 및 인접이 드물다 하여 조계종의 11교구 본사를 지금의 경주 불국사로 옮김에 지금은 비록 불국사의 말사로서 20여명의 납자가 수행하고 있지만 그 옛날의 영화를 되찾기 위한 복원사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데 그 일환으로 이미 응진전이 복원되었으며 기림사 복원 전적(典籍) 총 54권 71책과 부처님 진신사리 4과, 비로자나불 복장 전적, 건칠보살상, 복비, 탱화, 조선초기의 경판 수십장, 와당, 각종 서책등 5백여점을 구분하여 이 나라 후손에게 영원히 물려주기 위한 작업으로 지난해에 주지로 취임한 장법일스님이 사계(斯界)의 고증에 입각, 35평씩의 박물관 2동을 지어 오는 6월에 개관, 여법한 불교사적 박물관으로 전국의 사부대중을 맞이하게 된다.
이와 아울러 천수천안의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진 관음전 우측에 호구호법의 기원을 응집시키기 위해 청자로 빚은 도자 부처님 3천불을 봉안코자 건평 1백8평의 호국삼천불전을 세워 현재 80%의 공정을 보이고 있으며 전국의 선남선녀로 하여금 원불을 접수받아 3천불 중 2천6백여 부처님이 접수, 조성되어 중생들이 부처님을 조성하면 선7대와 후7대, 그리고 자신까지 합쳐 15대가 성불을 이룬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여설수행(如說修行)하고 있다.
 
이러한 사역을 지닌 한국의 사찰에서는 목어(木魚)를 울려 수중의 중생을 구제하고, 우판 소리를 내어 공중의 중생을 화도하며, 법고를 쳐 지상의 중생을 제접하고, 범종을 삼세시방에 발성하여 일체의 지옥 중생을 거듭나게 한다면 물밀 듯이 밀려오는 서구의 무분별한 배금사상은 부처님의 사자후로 일소해 버릴 수 있으리라 확신을 해 본다.
종무소의 사무원, 후원의 공양주, 소임을 맡은 스님, 경내를 분주히 오가며 청정도량을 이루고자 신수분렬의 고행으로 사역병이 되다시피 한 주지 장법일 스님 등 사중의 식솔들이 이체동심이 되어 일사분란하게 책임을 다하는 모습에서 지금도 훌륭한 한국의 대찰이지만 앞으로 더욱 면모를 일신한 도량이 될 것이라는 의지를 엿보게 한다.
 
사찰의 창건당시부터 끊어지지 않고 울렸다는 지장기도 소리를 뒤로 하며 현세안온과 후생선처의 부처님의 자비를 마음껏 머금고 매표소를 나서며 면모가 일신된 기림사의 전경을 머리 속에 그려본다.
 


 
봉황산 부석사

1.  한국 불교의 위상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끈질긴 민족의 존속과 궤를 같이 하여 오랜 역사를 지내온 한국불교는 신심있는 신도 수를 헤아리기 이전에 그 탁월한 사상성과 진정으로 삶을 사고할 수 있는 철학적 매력으로 인해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를 뻗어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불교전래의 초창기를 더듬어 보면 원효와 의상이 우뚝 솟아 있음을 볼 수 있고 그 중 의상은 불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한 인물로 조명되고 있다.학문적 한국불교 위상의 선두에 나서 지주로서의 역할을 담당해낸 의상. 의상의 화엄선풍이 빚어낸 영주(榮州)의 부석사(浮石寺)는 태백산의 준령중 봉황산(鳳凰山) 자락에 일찍이 1천3백여년 전에 자리를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경북 영주는 5백리 낙동강의 남상이고 삼국시대의 국경을 이룬 곳이었다. 이제 그런 흔적을 찾을 순 없지만 부석사는 남아 있다.
 
의상이 화엄사상과 부석사 창건에 얽힌 선묘(善妙)와의 설화가 고색의 품위를 잃지 않고 세인을 맞아 들인다. 마을 어귀의 진달래며 개나리가 봄기운에 푹 젖어들게 한것과 달리 이곳 부석사에는 아직 완연한 봄빛이 아니다. 다만 파릇하게 올라선 잔디가 봄의 서막을 알리고 있을 뿐이다.

2.  인간의 삶은 기껏해야 백 년을 넘지 못한다. 게다가 나름대로의 삶의 의지를 갖고 자신만의 생을 꾸려나가는 기간은 얼마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삼에 대한 근본적 회의와 허무가 시작되고, 그러한 것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예술, 문화, 철학 등 제분야에서 흔적을 남겨놓게 된다.
 
불교라는 테두리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찰이라는 것이 처음 인도에서 하안거의 우기 중 탁발이 어렵고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자 일정기간만 대중이 모여 생활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인데, 우리에게 있어 사찰은 탁발이 허용되지 않는 지금, 승려생활에 꼭 필요한 조건이 되고 불교의 문화 예술 사상 등을 발전시키고 흔적을 남겨놓은 역할의 매개체가 되고 있는 것이다.
 
봉황산 중턱의 부석사 또한 그러한 의지로 창건되었다. 의상대사가 화엄종을 전파하기 위한 의지처로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2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에 세워진 부석사는 창건에 얽힌 설화가 애틋한 사연을 담고 전해져 내려온다. 송고승전 의상전에 전해오는 이 설화를 소개하면, 의상의 나이 스무살 때, 당나라에서는 화엄교학이 한창이라는 소문을 듣고 원효와 함께 도당 유학의 길에 오른다.
 
여기서 연상의 원효는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닫고 당으로의 유학길에 포기하고 신라로 되돌아 가지만, 의상은 끝내 죽음을 무릅쓰고 유학의 길을 떠난다.  이 일로 해서 세상은 원효를 더 높이 평가하기도 하지만 전후사정을 곰곰 되짚어 보고 인식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면 이 또한 편견임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의상이 상선을 타고 등주해안에 도달, 한 신도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집에는 선묘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의상의 용모 또한 청하하고 기품 있음을 본 그녀는 의상을 가까이하려 애써보지만 움직일 수 없음을 느끼고 그 앞에서 다음과 같은 대원을 발했다. “세세생생에 스님께 귀명하겠습니다. 대승을 배워 익히고, 대사를 성취하겠습니다. 제자는 반드시 시주가 되어 스님께서 필요로 하는 생활품을 바치겠나이다.”
 
그 후 의상은 지엄삼장에게로 가서 화엄학을 배웠다. 공부를 마치고 전법을 위해 귀국길에 오른 그는 다시 그 신도의 집에 들러 그동안 베풀어준 편의에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 때 의상대사가 돌아온다는 소문을 들은 선묘아가씨는 의상을 위해 법복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집기들을 함에 가득 넣어 의상을 찾았으나 그가 탄 배는 이미 선창을 떠났고, 그녀는 해안에서 아련히 멀어져가는 배만을 지켜봐야 했다.
 
배를 바라보던 그녀는 마음속으로 간절한 기원을 하며 ‘나의 참된 본심은 법사를 공양하는 일입니다. 원하옵건대, 이 옷함이 저배에 닿기를...’하며 옷함을 물위에 던졌다. 그러자 옷함이 의상이 탄 배에 도달했고, 그녀는 또 다시 맹세하여 자신의 몸을 용으로 변해 스님이 탄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신라땅에 이르도록 해주었다.
 
귀국을 한 의상은 산천을 두루 편력하며 화엄학을 펼쳐 보일 땅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의상이 도착한 곳은 지금의 부석사가 세워진 자리다. 여기야말로 땅이 신령하고 산이 수려하니 참으로 법륜을 굴릴 만한 곳이라고 여긴 의상은 왕의 명에 따라 절을 세우려 하지만, 다른 잘못된 주장을 하는 종파의 무리들이 5백이나 모여 있는 것을 알고는 대화엄의 가르침은 복되고 선한 곳이 아니면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고민에 빠졌다.
 
이 때 늘 의상 곁을 따라다니며 그를 지켜온 선묘는 의상의 이러한 생각을 감지하고 곧 용의 모습을 바꿔 허공 중에서 바위로 변했다. 넓이가 1리나 되는 바위가 되어 떨어질 듯 말 듯 주면을 맴돌자 소승에 집착한 군승들은 그 돌을 보고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리하여 의상이 원하던 길지에 부석사의 창건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선묘의 의상에 대한 지극한 발원과 의상의 구도자적인 마음은 부석사 창건의 신비함과 함께 참배객의 마음을 뜨겁게 한다.
 
이 설화와 함께 부석사에는 선묘정이라 불리는 우물이 있는데, 신동국여지승람에서는 가물 때 이곳에서 기도를 드리면 감응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의상을 도와 천리 이역의 땅에 오게 된 선묘의 넋이 1천3백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부석사를 지키며 살고 있다고 하니 이 절의 무량수전 밑에 묻혀있는 석룡이 그것이다.
 
아미타불 바로 밑에서부터 머리부분이 시작하여 앞뜰 석등 아래에 그 꼬리부분이 묻혀 있다고 하는 이 석룡은 일인들에 의해 부석사가 크게 개수될 때 이 거대한 석룡의 일부가 묻혀있는 것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3.  “이 곳에 처음 왔을 때 대석단과 높게 솟은 안양루 무량수전의 위용을 보고 위압감만을 느꼈습니다...” 부석사에서 공부한 지 3년이 돼 간다는 스님 한 분이 경내를 소개하며 한 말이다. 천왕문을 지나 눈앞에 다가선 대석단은 스님의 말대로 금세 들뜬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놓을 만큼 묵직한 무게에다 천 년의 세월의 영고성쇠를 안고 의연했다.
 
여느 계단보다 조금 높게 쌓여진 층계를 힘겹게 오르면 날렵히 오른 안양루와 대소 당우가 눈에 들어오는데 푸른색과 붉은색의 조화로운 단청빛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고색창연 그대로다. 언뜻 보기에 초라하게 느껴지는 당우의 빛깔들이 차츰 안개에 익숙해지면서 느껴지는 세월의 무게는 전통과 고전미로 대변되어져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된다. 부석사는 대소 당우와 탑 누각 심지어 나무에 이르기까지 국보와 보물이라는 또 다른 이름들을 하나씩 앞세워 놓았다.  그 중 부석사의 본당 무량수전은 국보 제18호로서 동양최고(東洋最古)의 목조건물이라는 점에서 가장 주목받는 유물이다. 무량수전 앞에서 내려다 본 봉황산과 부석사의 탁트인 전경은 참으로 뛰어나다.
 
 안양루에 걸려있는 무량수전급제각중수기(無量壽殿及諸閣重修記)의 한 구절은 만인의 정감을 대변하고 있다.  “... 몸은 바람 난간을 의지했으나 무한강산은 다투어 발 아래에서 달리고, 눈은 하늘 가 넓고 넓은 건곤(乾坤)을 따라 저 복중(腹中)에 다 거두어 들임이니 가람의 승경(勝景)은 이와 같은 곳이 없더라.”
 
고려 목조예술의 정화 무량수전은 문무왕 16년 의상에 의해 창건된 이래 약6백여년만에 적병에 의해 소실되었고, 홍무 9년 원응국사에 의해 법당이 개조되고 불상을 개금했다 한다.
 
공민왕이 썼다고 하는 무량수전의 편액이 중앙에 걸려 있고, 내부의 아미타여래좌상이 서쪽에 위치 동면(東面)하고 있는 특수한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불상 또한 그 조각수법이나 양식에서의 우수성이 현존하는 국내 최대최고(最大最古)의 소조불상으로 국보 제45호로 지정, 보호받고 있다. 이외에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국보와 보물 속에 선묘의 넋이 화한 부석은 아무런 명패 없이도 그 뜻이 고고하다. 무량수전 뒤편의 이 부석은 한 덩이의 큰 자연 반석으로 돌무리 위에 비스듬이 놓여져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참배객의 염원이 쌓여진 돌탑이 놓여져 선묘의 영혼이 외롭지만은 않다.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 보면 ‘언뜻 보기에 돌무리 위에 얹혀진 바위가 서로 붙어 있는 듯 보이나 자세히 살펴보면 약간의 틈이 있어 노끈을 넣어보면 거침없이 드나들어 뜬 돌인줄을 알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실제로 이 반석이 떠있다고 생각할 수는 엇지만 선묘가 사도(邪道)에 집착한 무리들을 쫓아내기 위하여 돌이 되어 공중으로 날아다녔다는 창건설화를 상기할 수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은 화엄의 세계를 설하고 그 설한 바에 따라 부지런히 행함을 귀중히 여겨 강의하는 일 외에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화엄일승법계도’를 위시하여 몇 권의 저술을 남겼다. 물론 많은 분량의 저술 활동을 펴진 않았지만 그이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사상은 불교를 학문적으로 발전시켜, 깨우침만이 불교의 전부인 양 생각하는 일단의 무리에게 경각심을 주었던 것이다.
 
 그는 ‘화엄일승법계도’의 말미에 ‘인연으로 생겨나는 일체의 모든 것에는 주인이 따로 있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저자명을 기록하지 않는다’고 적어 놓았지만 후인에 의해 이 책의 저자가 의상임이 밝혀졌다. 태백산 부석사로부터 발단한 의상의 화엄종은 그의 제자 십상수삼천문도(十上首三千門徒)라고 할 만큼 크게 번성했다. 그런데 지금의 부석사는 아니 지금의 불교는 그만한 선각자의 부재로 인함인가 그 염원이 날로 적막하게만 느껴진다.
 
무량수전 뒤편 오솔길을 걸어 오르면 조사당이 나오고 그곳에는 의상ㅇ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그 앞에 의상이 꽂아 놓은 지팡이가 자라서 되었다는 비선화수(飛仙花樹)가 철망 속에 갇혀 잎새 몇을 가지밖으로 내밀어 놓았다. 다시 한번 의상과 같은 선각자의 도래를 기다리며...
 

 
가야산 해인사

1.  깎은 듯 아아(峨峨)할 뿐 도도(陶陶)함이 없는 너 가야(伽倻)의 이마.
  푸른 천년의 낙락(落落)이 문이 되고 그 사이로 흐르는
  무상(無常)의 동(洞)길이 홍류(虹流)의 물소리로 종종(淙淙)하다.
  고목의 허벽(虛壁)을 치는 딱따구리의 색공 두 글자에
  집념한 직승(職僧)의 목탁소리가 화(和)한다지만
  준령의 정상을 넘어 오는 송뢰(松籟)와 한석(寒夕)을
  높이 외마디하는 까마귀의 소호(嘯呼)를 어찌 겨루랴.
  고운(孤雲)이 한 번 들고 나온 자취없다함은
  인적출입의 욕됨을 잠깐 염취(廉恥)하였음인지.
  팔만장격각 용마루에 하늘 빛 청(靑)기와가 녹슨다고 할지라도
  번뇌무진 속에 생사불수(生死不隨)의 법호는 빛나리라.
 
이상은 효공의 후예임을 자부하는 시인 파성이 ‘가야산 해인사’에서 읊은 감히다. 파성의 문재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한 없이 신비로운 가야산 중턱에 법보종찰 해인사는 자리하고 있다. 높이로 따져보면 명산이 되지 못하였을 지도 모를 가야산이 갖는 무게는 자연히 홀로 빼어나지 않고 사람과 함께 어우러져 구축한 가야산만의 분위기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있을 해인삼매. 파릇한 연기가 주위의 어둠을 쓸어내는 가야산 해인사의 뜰에서 맞는 여명이 가져다 주는 삼매는 기어이 출가한 결행의 의지가 응축된 삼매이다. 그것은 무한한 환희이고, 중생에 대한 자비이며 또 다른 깨달음의 시작일 수 있다. “전생에 쌓은 복덕이 얼만큼 되어야 이런 곳에서 살 수 있나요”하며 한 스님에게 합장하는 객승의 인사말이 일주문 앞에서의 발목을 붙잡는다. 또렷이 들려온 그 스님의 말이 잠시라도 출가자의 마음으로 해인사를 찾은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에 깊은 의미를 던져준다.
 
속세의 들뜬 공기가 이 만큼 차분히 가라앉아 있는 것은 가야산의 정기 탓도 있겠지만 이 곳을 찾은 사람들이 이미 자연과 같은 속도로 호흡을 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가야산이 갖는 힘일 것이다.

2.  소백산맥이 덕유산을 앞두고 동쪽으로 뻗어 경상북도와 남도의 경계를 구획하면서 일대지맥을 형성한 곳이 가야산맥이다. 시인묵객들의 제영으로 나름의 정취를 즐기고 남겨진 무릉교, 홍필암, 음풍뢰, 취적화, 제월담, 홍류동 등의 명소가 해인사 들목의 절경을 대변하고 있고 그 중 홍류동의 절승은 최치원의 전설과 어우러 신비감마저 느끼게 한다.
 
홍류동의 입구 오른편 석벽에 최치원이 남겨논 싯구는 별천지 가야산을 얘기할 때면 으례히 떠오르는 표상처럼 남아 있다. 또한 가야산은 예부터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산신이 머무는 신령스런 산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는 해인사 안에 정견천왕사(正見天王祠)를 마련하고 정견모주를 위한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산신이 머문다는 가야산은 그 골이 깊고 궁벽하여 예부터 전란(戰亂)의 화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일컬어졌다. 고려때 판각된 대장경이 이 곳에 봉안된 것과 고려 고종이 1227년 ‘명종실록’을 해인사에 보관한 것도 다 그러한 까닭에 연유한다.
 
범어로 ‘소’라는 뜻을 가진 가야산의 불연과 맺어진 해인사의 창건을 알려주는 문헌은 「가야산해인사고적」 및 「해인사중창기」가 전해지는 가운데, 최치원의 「신라 가야산 해인사 선안주원벽기」에서 그 시작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신림의 제자 순응이 서기 766년 중국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가 신라로 돌아와 애장왕 3년(802) 가야산에 해인사의 창건을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성목태후가 불사를 도와 진행해나가다 순응이 갑자기 돌아가게 되자 이정이 그의 뒤를 이어 마침내 완성을 보았다고 전한다.
 
한편 「가야산해인사고적」에는 해인사 창건에 설화의 요소를 첨가해 놓았다. 양나라 보지공(寶誌公)이 임종시에 제자들에게 「답산기」를 주면서 고려에서 온 두 스님에게 전해줄 것을 유언했으니 그들이 순응과 이정이며, 다시 공의 유언에 따라 두 스님은 신라로 돌아와 선정에 들어 아무런 잡념이 일지 않는 길지를 찾아냈던 것이다.
 
이 때 애장왕의 왕후가 등창이 나서 어떤 약으로도 효험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선정에 든 두 스님이 오색실을 주며 궁전 앞 뜰에 심어져 있는 배나무에 한 쪽 끝을 매고, 다른 한 끝은 등창난 곳에 대도록 시켰다.
 
과연 스님이 시킨대로 하자 왕후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고 대신 배나무가 말라 죽는 이적을 보였으니, 애장왕은 두 스님이 있던 절에 와서 전답 2천5백결을 바쳤다한다. 이러한 유래 속에서 해인사 창건의 의의는 해인이라는 절의 명칭에 응축되어 있다.
 
해인이란 대방광불화엄경 중에 나오는 해인삼매라는 삼매의 경지에서 비롯한 것으로 화엄의 철학과 사상을 널리 펴고자 하는 의지에서 이루어진 화엄의 대도량인 것이다. 우리나라 화엄학은 신라시대 당나라 지엄의 문화에서 화엄을 공부하고 귀국한 의상이 문무왕 16년에 부석사를 세우고 황엄종지를 떠나가면서 시작됐다.
 
그의 문화에 십대덕(十大德)을 비롯한 많은 화엄종장들이 배출되었고, 이들은 부석사, 화엄사, 범어사, 해인사 등의 화엄십찰을 창건했다. 해인사의 창건주 순응 역시 의상의 법손이다. 그리하여 해인의 창사정신이 와엄의 사상에 있음은 당연하다.

3.  화엄종찰의 해인사는 실제 법보종찰로 더 알려져 있다. 이것은 고려대장경의 보관으로 인해서다. 불서의 총집성을 중국에서는 대장경이라고 불렀고, 이러한 책들은 서사로 전래되어 오다가 우리에게는 최초로 1011년에 고려의 현종이 대장경판을 새겨 부인사(符仁寺)에 두었고, 그때부터 대장경판의 조조(雕造)는 호국의 중요한 불사로 간주되어 각국에서, 그리고 중국의 몇몇 사찰에서는 앞을 다투어 조성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해인사에 소장된 대장경은 제1차 조조의 대장경이 아니다. 초기 부인사에 소장하였던 대장경판이 몽고병에 의해서 소실되었고, 제2차 조조 고려대장경이 현재 해인사에 보관하고 있는 소장본이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문종의 넷째아들 의천이 흥왕사에서 속장경의 조조를 실시하여 현본 대장경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는 점이다. 경판의 재료는 제주도, 완도, 울릉도, 거제도 등지에서 많이 생산되는 백화라는 이름의 나무를 벌채해 와 3년 동안 바닷물에 담가두었다가 꺼낸다.
 
 다시 그것을 같은 크기로 조각을 낸 다음 소금물에 삶아, 그늘에 말리고 그런 후에야 대패질을 해서 그 위에 경문(經文)을 붓으로 한자한자 써나가면, 그에 따라 글자를 새겨 나가게 된다. 마무리를 위해 경판의 두 끝에는 각목으로 마구리에 붙여 뒤틀리는 일이 없도록 하였고, 전체 판 위에다 가볍게 옻칠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네귀에는 동렬장식을 달아 놓는 것으로 모든 작업을 마감한다. 이러한 정성스런 과정은 고종 23년에 대장도감이 설치되어 고종 38년의 16년이란 세월을 걸쳐 완성해내는 역량을 보여 주었다.
 
대장경 주조는 물론 나라를 지키고 외적을 물리치게 해달라는 민족의 단일된 염원이 서려있음에서 더 큰 의의를 찾기도 한다. 거기에다 오자 하나 발견할 수 없이 정치한 솜씨로 제작된 대장경은 그래서 우리만의 자랑이 아닌 세계의 보물로 남을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장경이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옮겨지게 된 것은 속장경을 조조한 의천이 한 때 해인사에서 장주할 생각을 했던 인연 깊은 곳이었다는 점과 여말선초(麗末鮮初) 극심한 왜구의 노략질 앞에 가야산의 그윽하고 신령스런 산세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되어졌기 때문이다.
 
 법보사찰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의 위대함과 더불어 그것을 보관한 대장경 판전에 담긴 조상의 슬기가 또한 돋보인다.  대적광전 뒤편에 우뚝 솟은 장경각의 보안당에는 상하 60간의 대장경을 말끔히 정돈해 놓은 건물이 그것으로 이 건물의 양식은 원주의 중각부분을 가장 굵게 한 기둥의 수법이 고려 건물의 특수성을 나타낸다.
 
해인사의 수 차례에 걸친 화재에도 이 건물만은 재난을 면하였고 개방된 창문으로 날짐승이 침범하지 못하는 신령스러움 속에 양편에 뚫린 창문의 크기와 배열, 진열장치, 통풍, 방습 그리고 인경(印經)의 작업을 할 때 통행의 편의 등을 감안한 조상의 슬기는 생각할수록 감탄의 대상이 된다.
 
이런 정성과 합일된 의지를 표출할 수 있는 민족의 역량이란 그리 흔한 일은 아닐 것이며, 불법이란 귀의처 없이는 상상조차 힘든 일인 것이다.

4.  화엄세계의 구현을 위하여 창건한 해인사가 여말 팔만대장경의 봉안으로 인하여 법보사찰로서의 면모를 과시해 온 것이 너무도 큰 표상으로 자리해 여타 해인사만의 것을 드러내는 일은 좀처럼 드문 일이 되었다.  하지만 출가사문이 되어 부처님께 귀의하기를 서원한 이는 한번쯤 해인사와 인연 맺기를 간절히 기원했을 것이다. 이러한 서원은 당연스레 해인사에 있어 고승은 물론 대덕까지도 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위로는 화엄사찰답게 의상을 위시하여 신림대덕, 희랑대사 등 신라시대 화엄의 대가들과 한국불교사를 통해 뚜렷한 족적을 남겨 둔 사명대사, 부휴선사, 고한희언, 벽암각성의 대덕들과도 인연을 맺어 놓았다.
 
또한 유명무명의 무수한 스님들 속에 섞여 선경(仙境)의 미소를 흘린 이들이 있으니, 학사대의 주역 최치원을 필두로 하여 대장경 조성의 전설적 이야기를 남긴 이거인, 그리고 추사 김정희선생과 정인홍등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해인사의 서편 홍제암을 비롯 조계종의 종정 성철스님이 계시는 백련암에 이르기까지 가야산에 산재한 부속암자를 찾는 길은 해인사를 거쳐간 스님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기회를 준다. 큰 절에서 제일 가까운 홍제암으로 가는 길에는 사명스님의 비석이 비록 상처입은 모습이지만 스님이 입적한 곳임을 알려주고 있고, 조금 높게는 지족암이 있어 포랑스님의 손길을 느깔 수 있다.
 
지족암에는 현재 일타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는데 근대 어려웠던 해인사의 안팎 살림을 보살피는데 큰 힘을 기울이셨던 분이다. 스님은 늘 자신이 다닌다는 산책로를 걸으시며 해인사의 또 다른 정취와 역사를 들려주시고는 자기 본바탕의 천진한 마음을 지켜나가는 것이 정진임을 일러 주신다.
 
해인사를 한번 다녀와서 모든 것을 느끼려고 하는 것은 욕심이었다. 그만큼 가야산의 정취가 그윽하고 해인사에 담긴 뜻이 또한 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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