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찰(동화사,범어사,용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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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찰(동화사,범어사,용주사)

마이템플 0 2997
팔공산 동화사

부처님 근처 불교문화
 
  대구에서 동북쪽으로 22㎞쯤 떨어진 지점에 웅장한 산세가 병풍처럼 날개를 펴고 앉은 팔공산(八公山) 비로봉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봉과 서봉을 거느렸으며 북녘의 시루봉과 동남쪽의 염불봉․수봉․인봉․노적봉․관봉 등이 한준령을 폈고, 서쪽으로는 파계봉을 넘어 가다가 다시 방향을 북서쪽으로 꺾어 가산 다부원
을 거쳐 소야현에 이르렀다.
 
동화사(桐華寺)는 팔공산 남쪽 기슭 도학동에 앉아 있는 지은지 1491년이 되는 조계종 제9교구 본사, 행정구역상의 지번(地番)은 대구직할시 동구 도학동 35번지.
 
 팔동산은 산정(山頂) 근처의 급경사를 빼고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수숫골․폭포골․학골․바윗골 등지를 흐르는 산수는 남서로 흘러 문암천에서 머리를 모았다가 다시 금호강으로 유입해 들어간다. 이와 같은 산수의 흐름을 돕는 산세 또한 기암과 괴석을 안아 변화많은 청암벽류의 계곡과 수림으로 빼어난 경관을 이루어 일찍부터 우리의 소중한 불교정신 문화를 표출해내서 이 지방 사람들에게 문화인으로서의 긍지와 명소로서의 자랑을 더디지 않게 했다. 

  동화사의 창건연대는 신라 21대 소지왕 15년(493). 극달화상(極達和尙)이 이루어 처음에는 유가사(瑜伽寺)라 불렀다. 다시 42대 응덕왕 2년(832)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중건할 당시 겨울인데도 주변에 오동꽃이 아름답게 만발해서 그 이름을 동화사(桐華寺)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사적기는 적고 있다.
 
도학동에서 18km쯤 남쪽으로 상거해 있는 대구는 낙동강 중류의 기름진 금호평야에 약 3천여년 전 취락이 형성되어 AD 1세기경에 달구화(達句火)라고 부르는 부족국가로 성장했다. 처음에는 신라땅에 속해 있었다. 대구라는 이름은 757년에 얻었으며, 1945년에 자치시, 1950년에는 자유 수호의 최후의 보루이기도 했다. 1981년 직할시로 승격 인구 1백80만이라는 국제적인 도시로 성장했다. 대구에서 15분 간격으로 들어오는 시내버스를 의식하지 않아도 대구와 동화사는 이미 한 울 안에 있음을 느끼게 한다.
 
사하촌(寺下村)을 지나 산구(山口)에 이르는 작은 시내를 가로건넜을 때 해는 서서히 서산으로 빠지고 나목들이 삼목(森木)처럼 울울하게 늘어서 있는 산곡에는 겨울산의 냉기가 산상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와 함께 번져내리고 있었다. 넓지 않고 산허리를 가볍게 안고 도는 산길을 따라 얼마쯤 걸었을가. 일주문(一柱門)이 눈앞에 와 섰다.
 
 그 일주문에서는 그림같은 해탈교(解脫橋)가 올려다 보였다.  해탈교 앞에는 차(茶)를 파는 여인이 아무도 없는 겨울날 깊은 산골의 적요를 달래며 질화로의 불을 지피고 앉아 있었다. 자리에 나앉아 당간지주(幢竿支柱)와 금당선원(金堂禪院)에 어린 산안개를 바라보며 차 한잔을 청했다. 4년째 한 자리에서 차를 끓인다는 여인의 얼굴에는 세상을 사는 역겨움이나 못볼 것을 보아온 사나운 기운이 전혀 서려 있지 않았다.
 
역시 부처님이 계시는 근처의 산자수명과 참되고 부드러움을 쫓는 불자(佛子)들의 호흡이 짙어, 자연스럽게 번져오는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그러려니 싶었다. 차 값을 치루고 해탈교를 건너 옹호문(擁護門)을 들어서면서 드높은 누각 봉서루(鳳棲樓)를 바라보니 훤칠한 동화사의 도량이 마음을 끌었다. 봉서루 밑으로 트인 돌계단을 올라 대웅전에 들어 불전에 머리를 조아렸다.
 
‘부모님으로부터 몸을 받아 태어나기 전의 내 참 면모는 무엇입니까?’ 약사여래불을 왼편에, 아미타불을 오른편에 하고 한 중앙에 거룩한 위용으로 정좌한 본존불을 이윽히 우러러 보며 마음속으로 밝고 밝으신 부처님께 물었다. 웅장한 건물의 처마끝에 걸린 풍경만이 이 준령을 쓸고 내려온 솔바람에 흔들려 고요를 깨뜨릴 뿐이었다.
 
원당(願堂)에서 나와 석축 위에 서니 눈안에 든 강생원(降生院) ․ 심검당(尋劒堂) ․ 원음각(圓音閣) ․ 봉서루(鳳棲樓) 등이 병풍같았으며 원당과 조금 상거하여 영산전(靈山殿) ․ 조사전(祖師殿) ․ 천태각(天台閣) ․ 산신각(山神閣) ․ 칠성각(七星閣) 그리고 크고 작은 11동의 요사(寮舍)등이 산촌을 이루었다.
 


 
팔공산의 숨소리
 
  태백산맥을 그 큰 맥락으로 하여 달려나온 팔공산은 해발 1192m 동화사의 숨결로 하여 영남의 명산으로 높은 이름을 얻었다. 팔공산을 중심으로 동에는 은해사(銀海寺)가 서쪽에는 파계사(芭磎寺)가 각각 그 불심의 도량을 구축하고 있다.
 
 이 산정(山頂)의 동남쪽 능선 관봉에는 약사여래불이 앉아 천여 년을 한겨같은 미소로 하계 중생들의 삶을 지켜보고 있고, 서쪽 능선이 끝나는 곳에는 아미타불이 앉아 정토발원(淨土發願)을 쉬지 않고 있다.
 
제2의 석굴암으로 회자되 이 아미타불은 겨레의 보배(국보109호)로 지정되어 찬연한 이곳의 불교문화재로서 변함없는 전승을 지속해 나오고 있다. 팔공산의 처음 이름은 부악(父岳)이었다. 그러다가 중악(中岳)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세 번재에는 제천단(祭天壇)을 두어 공산(公山)이라고 했는데, 이는 신라때의 이름이다. 필공산은 이 제단(祭壇)에 팔간자(八簡子)를 봉안한 뒤로 붙인 네 번째의 이름이 되는 것이다.
이때가 고려 예종때의 일이다.

  팔공산에는 큰 바위마다 불상이 조각되어 있어 온 산에 불상의 그림자와 그 아름다움이 산세와 어울려 장엄을 더하고 있으며 영남지방의 많은 주민들의 근본심성에 부드러움과 온화함을 심어 많은 서민들의 정신적인 안식처와 종교적인 귀의처가 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맥락을 고려 때 예종이 시행한 공식적인 국가적 행사로서의 기제(祈祭)실시의 역사적 배경을 살핌으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것이다.
 
팔공산은 기제의식의 실현장이었다. 역사적 배경과 함께 이곳 동화사에는 많은 불교문화재들이 있어서 국보로, 혹은 보물지정으로 찬연한 불교문화의 숨결을 토해내고 있다. 팔공산 서쪽 능선에 앉은 국보 아미타불을 접어 두고도 동화사의 가까운 경내지에 보물이 다섯 점이나 산재해 있다.
 
신라 홍덕왕때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친히 정을 들어 조각했다고 하는 약사여래불상은 화강암에 새긴 마애불상(보물243호)으로 유명하며, 비로암석조 비로사나불좌상(毘盧庵石造毘盧舍那佛坐像:보물244호), 비로암 삼층석탑(보물247호), 당간지주(보물254호), 진평왕 4년에 대웅전 앞에 세웠다가 헌강왕 1년에 금당(金堂)으로 옮긴 금당암삼층석탑(金堂庵三層石塔:보물248호)등이 동화사의 도량을 빛내고 불교문화재들.
 
이밖에도 관세음보살의 친필이라고 일컫는 패엽경(貝葉經), 당대(唐代)의 요령(搖鈴), 구룡대 금강저(金剛杵), 관수대영남도 총섭인, 대종, 대법고 등 열 네가지나 되는 진귀불교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이 가운데에서도 임진왜란시 승병을 지휘하는 데에 사용했던 나팔과 흡사한 「소라」와 영남 일대의 대소 사찰을 지휘하는데에 사용했던 영남도총섭인, 동화사총섭인 등은 사료(史料)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은 불교유품들이다.
산내 암자로는 부도암(浮屠庵), 내원암(內院庵), 양진암(養眞庵), 비로암(毘盧庵), 염불암(念佛庵), 약수암(藥水庵) 등이 있으며 경봉(鏡峰) 석우(石牛) 서옹(西翁) 향곡(香谷) 구산(九山) 월산(月山)스님 등 선가(禪家)의 조실(祖室) 스님들이 많이 주석했었다.
 

 
동화사의 숙원사업
 
  동화사는 금당(金堂)선원으로 하여 이름이 높다. 그것은 선원을 잦아드는 선객들이 구름같이 이 금당에서 머무르고자 함이요, 선객들은 두 변(二邊)에 떨어지지 않고 곧장 나아가 확실한 자기의 주인공을 찾고자 하는 죽순같은 마음을 매일같이 고쳐 지니면서 자기와 피나는 대결을 벌이기 때문이다.
 
선(禪)은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정(定)과 혜(慧)를 조화하는 수행이다.
 
선을 하지 않고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이 선을 통해 정각의 문을 바라보고 나아간다. 변(邊)에 떨어지지 않고 곧장 가다가, 이럴수도 저럴수도 없는 발 붙일 데 없는 곳에 이르러 무위인(無爲人)을 만나, 그 사람이 바로 본래의 자기임을 확인하는 수행이 곧 선이다. 그래서 금당이 없는 동화사는 좀처럼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정화 이후 역대 주지들, 즉 정성문(1대), 배응연(2대), 이범행(3대) 최월산(4대), 소구산(5대), 김서운(6대), 김향곡(7대), 권혜종(8대), 이현칙(9대), 손경산(10대), 이자신(11대), 서의현(12대)등의 모든 스님들이 금당선원의 운영과 발전에 심혈을 쏟았다.
 
이화 같은 노력의 면면한 이어짐 속에서 한국의 선원하면 그 가운데 꼭 금당선원이 꼽힐 만큼 눈푸른 납자(衲子)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그런 금당선원이 이번 동안거 결제를 하지 못했다.
 
 “선원의 당우(堂宇)가 퇴락하여 비가 새는 형편에 있기 때문에, 내년에 완전한 보수를 끝내고 개할 계획입니다. 선원을 비워두는 마음 매우 아픕니다.” 지난 12월 10일 수덕사(修德寺)에서 열린 본사 주지모임에서 본사 주지 친목회장으로 뽑힌 바 있는 서의현(徐義玄)동화사 현 주지스님의 얘기다.
 
 이 세상에서 지극히 아낄 것 하나를 누가 이야기 하라고 한다면 그것을 자유라고 말한 의현스님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자기자신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정신적인 능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자유를 누릴만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먼저 자유인이 되어야 된다고 말했다.   “선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점검하는 수행이며 스스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힘을 축적하여 해탈을 유도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금당선원의 의미는 매우 높고 크다고 생각합니다. ”
 
 서의현스님은 사람들이 깊은 산 속에 앉아 있는 산사를 찾는 것은 진실로 자기에게 있어서 지극히 아낄만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 만일 그런 것이 없어 아무렇게나 지내온 삶이라면, 조용한 심산의 부처님 곁에 잠시 앉아 있으면서 앞으로 다가오는 자기의 생애에서나마 지극히 아낄 것 하나쯤마음속에 간직해 돌아가고자 함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산사를 지키는 산승은 가람을 수호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참된 사람의 행로에 대해서 별다른 느낌이 없이 되는대로 삶을 열어 나가고 있는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명확하게 들려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소임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사실 바르고 옳은 지적이다. 부처님이 계시는 산사에는 속인들이 속진(俗塵)을 씻고 진실로 우리가 누리는 삶을 통해서 정당하고 의로움을 추켜세워 나갈만한 힘을 제공받는 본심을 맑게 간추릴 수 있도록 따스한 손길을 펴 주는 도량이다.
 
“ 그 일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이 곧 포교의 뿌리입니다. 본사와 말사 간의 모임주선이나 대내적인 종무행정의 바른 추진도 빠뜨려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그런 일은 지엽적인 일이고 우선적으로 빠뜨려서는 안될 선무(先務)는 곧 뭇사람(衆生)을 만나 본심(一心)에 돌아가도록 길을 안내해 주는 노력입니다.”
 
서의현스님은 그와 같은 일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고자 대구시 신암동에 정법사(正法寺)라는 포교당을 개설했으며 청년학생들이 거리감 없이 불교에 접근할 수 있는 불교센터를 만들 계획을 갖고 있음도 비췄다.
 
대구직할시가 바로 문앞에 있으니, 이곳을 불교포교의 전진기지로 해서 부처님의 가리침을 널리 펴 나가겠다는 강력한 신념을 내보인 의현스님은 우선 성도제일행사를 대구실내체육관을 빌어 일반불자의 동원에 힘쓰겠다고 한다.
 
“금년까지 70여개 말사의 미등록 망실재환수에 힘썼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우리 불자들의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재육성을 위한 장학사업이나 일반신도들의 자녀교육을 위한 학교교육기관의 확충에도 있는 힘을 다 쏟아보고 싶습니다.”
 
 우선 능인(能仁)학원의 기틀을 다져 내년에는 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할 계획이며 유치원과 양로원도 개설하여 지역주민과 애환을 함께 나눌 수 있는 포교활동을 전개하겠다고 의현스님은 말했다.
 

 
금정산 범어사

호국의 터 금정산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의 명패를 지닌 범어사(梵魚寺)는 1천6백여년의 세월동안 민족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면면히 담당해 온 한국불교의 태동과 발전 그리고 미래를 한 눈에 조감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대찰(大刹)이다.
 
 부산시 금정구 청룡동 546번지가 행정상 범어사의 구역을 가름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금정산 범어사라 함이 제짝을 맞춰서 따라다니는 범어사의 소재지다. 금정산은 금강산 보다 훨씬 더 북쪽에 있는 추가령 구조곡에서 갈라져 나와 한반도의 등뼈를 이룬 태백산맥이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치달아 이루어 놓은 산이다.
 
산의 주봉은 범어사 뒤쪽으로 솟아 올라있고, 줄기와 부리는 서쪽으로 김해, 남쪽으로 동래, 북쪽으로 밀양과 동쪽으로 울산에 각각 면해있다. 해발 796미터의 그리 높지 않은 금정산은 얼핏보아 평범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 부산 시민들에게는 한없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호국의 얼이 담긴 산이요, 빗물을 정화시켜 생명수를 제공하고 온갖 자연스러움을 뿜어내며 게다가 범어사를 보듬고서 길게 뻗은 부산의 선봉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금정산은 동래구와 금정구에 속해 있다. 동래하면 부산의 옛 중심지로서 통일신라시대부터 동래군이라 불려 경상남도 끝 지역의 행정, 산업, 교통, 문화의 주축을 이루던 곳이다.
1876년 개항과 더불어 알려지기 시작한 부산이 새로운 행정단위로 부상, 동래를 흡수해 버렸지만 나이 지긋한 동래 토박이들의 의식 속에는 아직도 부산은 동래군에 딸린 ‘배닿는 자리’의 하나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동래는 긴 역사에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곳이다.
 
금정산을 포함한 동래에 호국의 얼이 담겼다고 함은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성을 부수고 동래로 쳐들어온 왜군이 ‘싸울테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거든 길을 빌려내라’며 명나라를 치기 위한 길을 터줄 것을 요구하자, 동래 부사 송상현은 ‘싸워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하며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송상현을 포함한 천 여명이 넘는 관군이 목숨을 바쳤던 것을 말한다.
 
또한 불살생의 파계를 감수하며 나라와 정의를 위해 분연히 일어선 서산대사가 승병을 거느리고 왜적과 맞서 싸운 곳이며, 삼일운동때에는 범어사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한용운 선생의 지시에 따라 ‘범어사 학림의거’라는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도 했던 곳이니 그들의 죽음은 해방 46년을 맞는 지금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비켜달라고 한 요구가 핑계라 할지라도 동래는 실제로 대륙으로 통하는 길목이었고 교통의 요충지였음이 분명하며 동래에 있어 또 하나의 자랑거리인 온천은 지금도 부산의 관광명소로 손꼽히는 유명세를 발휘한다.
 
 조상들의 호국의지의 맥을 잇고 있는 동래산성을 내쳐두고 범어사를 향해 오르는 길은 걸어 들어갈수록 푸근하고 넉넉한 가슴을 갖고 있다.
 
천년 세월을 하루같이 불국토의 토대역할을 해온 공덕을 아련하게나마 느낄 수 있는 것일게다. 한 핏줄을 이은 후손으로서 조상과의 정신적 교감을 이룰 수 있는 순간인 것이다.  범어사로의 행로는 팔송거리로 이름 지어진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옛날 이곳에 소나무 여덟그루가 보기좋게 어우러져 정자를 이루었다는데서 연유한 팔송에서부터 범어사 입구까지 약 4km. 토산과 암산이 잘 조화되어 있는 금정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물은 동래민요 ‘큰애기’에서 ‘작으나 크나 알백이’라 노래할 정도로 고장을 풍요롭게 했고, 약수터 또한 군데군데 14곳이나 있어 등산객들의 목을 축여주는 감로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천혜의 수질과 토양은 온갖 꽃과 나무를 무성하게 자라게 하여 금정산을 봄부터 토실토실 살찌운다. 특히 바위 틈에서 뿌리를 내리고 용트림하듯 돌아 오른 범어사 계곡의 등나무떼는 백 년이 넘는 수령을 자랑하며 천연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되어 보라색 꽃을 활짝 피울 5월을 준비하고 있었다.
 
필요에 따라 당연스레 귀결되는 편리함은 차량으로 채 10분이 안되어 범어사 입구에 도달할 수 있게 해준다. 팔송거리를 지나치다 운좋게 범어사로 행하는 승객을 태우고 금정산을 오르게 되는 날은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는 택시운전사의 말이 실감나는 그런 길을 따라 다다른 범어사 입구는 추운 날씨 탓인지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금빛 우물 속의 범어(梵魚)
 
  범어사의 창건은 많은 이견 속에서도 삼국유사의 기록과 같이 신라 문무왕 18년(678) 의상(義湘)에 의해서였다고 보는 것이 가장 무리가 없다. 의상이 당으로부터 귀국한 후에 창건을 보고 그의 제자 표훈(表訓)등이 주석했던 범어사는 조선조 숙종26년 범어사 창건 사적(梵魚寺 創建 事蹟)을 통해서 그 연원을 살펴 볼 수 있다.
 
당 문종 태화(唐 文宗 太和)9년 우리로는 을묘 신라 흥덕왕(乙卯 新羅 興德王) 때의 일이다. 일찍이 왜인은 10만 병선을 거느리고 동쪽에 이르러 신라를 침략하고자 하였다. 대왕은 근심으로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이 지내는데 문득 꿈속에 신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대왕이시여 근심하지 마시오. 태백산중에 의상이라는 한 화상이 있는데 금강보개여래제칠후신입니다.
 
항상 성중1천(聖衆一千), 범중1천(梵衆一千), 귀중일천(鬼衆一千)의 3천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의지법문을 연설하며 화엄신중과 사십법체 그리고 제신 및 천왕이 항상 떠나지 않고 수행합니다. 또한 동국해변에 금정산이 있고 그 산정에 높이 50여척이나 되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바위 위에 우물이 있고 그 우물은 항상 금색이며 사시사철 마르지 않고 범천으로부터 오색구름을 타고 온 금어가 헤엄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의상스님을 맞아 7일 밤 7일 낮 동안 화엄신중을 독송하면 그 정성에 따라 미륵여래가 화현하고 보현, 무수향화동자, 사십법체제신과 천왕을 거느리고 동해에 임하여 제압하면 왜병이 자연히 물러 갈 것입니다.”하고는 사라졌다.
 
왕이 놀라 깨어나서 곧 사신을 보내 의상을 맞아 친히 함께 금정산에 이르러 7일 밤 7일 낮을 일심으로 독경한 결과, 왜선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대왕은 의상을 예공대사(銳公大師)로 삼고 금정산 아래로 범어사를 창건하였다. 산정(山頂)에 위치한다는 금빛 우물이 바로 금정산의 명칭이 되었고 범천의 금어가 범어사의 이름이 되었으니, 천여년 동안 금정산 범어사라 불리는 근거가 되는 이러한 창건설화를 자신의 이해범주를 벗어나고 있다고 해서 그저 황당한 옛날 이야기쯤으로 치부해 버릴 것인가?
 
정신문화가 고도로 발달한 일부 사회에서 있을 수 있는 응집력의 표출로 볼 수 있다면 또한 정신문화의 향유를 공감하는 여유로움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로운 창건기록도 허무하게 범어사는 임진왜란때 크게 불타버려 그 후 10여년을 폐허로 남아 있었다. 선조 35us(1602)에 관선사(觀禪師)가 중건을 하였으나 곧 또다시 화재로 불타 버렸으니 계속된 비운은 이것으로 끝이 나고 광해군 5년(1613)에 현감(玄鑑), 묘전(妙全), 계환(戒環)등의 스님들이 중창을 계속해 나와 오늘에 이르렀다.
잘 자란 청송 사이로 범어사의 사격을 나타내주는 높이 4m 가량의 당간지주가 보이고 곧 44o의 돌기둥이 굳건히 받치고 있는 조계문이 눈앞에 다가선다.
 
선찰대본산 범어사 일주문의 정면에서부터 일직선상으로 천왕문과 불이문, 보제루, 대웅전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종으로 단을 높여가며 정열하고 있는데, 이는 화엄십찰에 속하는 해인사, 화엄사, 부석사에서와 마찬가지로 높은 석계를 마련하고 다시 높은 대(臺)위에 불당을 세워놓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화엄학의 실천
 
  한국의 불교사상사를 정립시키는데 초점 역할을 한 화엄학. 화엄학은 일찍이 신라의 자장(慈藏)에 의하여 도입되었고, 자장에 의해 소개된 화엄의 철학이 본격적으로 신라땅을 풍미하게 된 데는 의상의 공로를 으뜸으로 평가하고 있다.
 
원효와 함께 도당유학을 절실히 염원한 의상이 원효의 귀국에도 불구하고 도당을 시도한 것은 오로지 중국화엄의 대가지엄(智儼)의 문하에서 화엄학을 공부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범부는 현실에 묻혀 살면서 영원한 진리의 세계를 망각하며 살기 쉽고 거꾸로 진리의 세계에 안주하면서 현실을 외면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화엄의 세계는 그것이 원융무애(圓融無碍)해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이것은 전체와 개체, 동질성과 특수성 성취와 자기희생의 원융이론인 화엄의 정신이 실천으로 옮겨졌다는데 그 의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의상에 있어서 불교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더 역점을 두었던 것이니 그 생명력은 찬연했다.
 
또한 의상이 그의 십대제자 가운데 진정(眞定)의 어머니를 위하여 화엄법회를 열고 추동기(錐銅記)를 저술하게 한 연기도 이러한 실천적 기풍의 좋은 실례가 되고 있다.
 
신라의 생활화된 화엄학을 널리 알리는데 일익을 담당한 범어사는 지금도 그 정신을 이어나가는데 게을리 하고 있지 않다. 화엄의 정신을 잇고 있는 범어사의 무거움은 금정산 곳곳에 자리한 산내암자와 더불어 존재하는 삼기(三奇)와 팔경으로 인하여 무겁지만은 않은 흥미와 운치를 전해준다.
 
삼기란 원효암 뒤편 암석이 매우 기묘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원효석대와 암탉과 수탉의 모습을 한 암석이 있었다는 자웅석계(雌雄石階), 창건설화와 함께 전해지는 바위 위에 금빛 나는 우물인 암상금정(岩上金井)이 그것이다.
 
팔경은 금정산 주위의 아름다운 풍치 여덟을 말하는 것으로 어산교 주변의 울창한 노송의 아름다운 경치가 첫째이고 계명암에서 바라보는 가을달의 운치가 두 번째이며 청련암 주위의 울창한 대숲에 내리는 빗소리를 나그네가 되어 청련암 객사에서 밤에 듣는 운치를 세 번째로 꼽는다. 네 번째는 계곡에 빽빽하게 박혀있는 자연석 무더기를 대성암에서 내려다 본 모습과 자연석 밑으로 흐르는 맑고 깨끗한 물이 그것이고 다섯 번째는 내원암에서 저녁예불을 기다리며 큰절에서 치는 은은한 종소리 속에 깊어가는 선사들의 선정. 여섯째는 가을하늘 아래 붉게 물든 단풍이 금강암 주위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고, 일곱 번째는 의상스님이 앉아 공부하던 석대에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대해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금정산 고당에서 흰구름이 산허리를 감고도는 선경이 여덟 번째를 차지하니 사철 조화로운 변화를 이렇듯 느낄 수 있는 심미안이 부러울 뿐이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이 진정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범어사의 선풍(禪風)
 
  근자에 들어 범어사는 선찰대본산으로서의 이름을 높이 하고 있다. 이는 무애도행(無碍道行)으로 유명한 경허선사가 금강산의 유점사 석왕사와 해인사 등지로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다 만년에 금정산 범어사로 발길을 돌려 선원을 짓고 후학을 지도했던 것으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선풍을 두고 이르는 것이다.
 
 또한 탁월한 지도력과 당대의 선지식으로 명명을 드날린 동산(東山)스님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동산스님 하면 범어사를 떠올릴 만큼 그 인연이 지중하다. 바로 범어사의 금어선원에서 대각을 얻었기 때문이다.
 
근세 혼란기의 불교계를 이끌던 큰스님 중의 한 분인 동산스님의 법맥은 작년 열반에 드신 지효스님으로 이어져있고 현재까지 범어사의 선원은 승속의 주목받은 바가 되고 있다.  대웅전 앞뜰의 3층석탑을 천천히 돌아나오다가 문득 지혜의 날카로운 칼을 찾는 수검(壽劍)의 푸른 눈빛과 마주친 것은 범어사 순례의 가장 큰 기억으로 남아있다.
 

 
성황산 용주사

1.  변화 없는 일상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은 자기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거미줄 같이 끈적끈적한 응집력이라고 할 수 있다. 신기하거나 새로울 것이 없는 생활이라는 이름의 기관차는 한시도 쉬지 않고 연료를 먹어치우고 있기 때문에, 기름이 바닥나서 움직임을 멈추게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연료를 공급해야 하고, 또 그 얼굴이 그 얼굴인 화부들과 기관차라고 하는 고정된 환경에서 스스로 지치지 않도록 일어서야 하는 끈질긴 자기 관리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는 힘이 따지고 보면 변화 없는 일상이 전해주는 응집력에서 파생된다.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범벅을 이룬 우리의 일상은 그것이 바로 무질서한 혼돈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우리들로 하여 도망가지 못하도록 우리들의 발목을 묶어 놓고 있다. 복날에 지쳐 있으면서도 복날로 인해서 혹서를 실감하듯, 인정사정없이 소비를 계속하는 일상 때문에 우리는 벌이를 위해서 궤도를질주해 가며 일상이 주는 아픔을 통렬하게 실감한다.
 
그러다 언제쯤인가 불현듯 이 일상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싶고 그 얼굴이 그 얼굴인 화부들 곁을 떠나 불시에 인적이 끊긴 바다 끝이나 무인 고도에 나가 서고 싶다.
 
이것이 일상에 빠져 허덕이며 생활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끔씩 자기가 있던 곳을 몰래 빠져나와 전혀 낯이 익지 않은 외지로 길을 떠난다.
 
하얀 갈대꽃이 너울거리는 산정이나 짙은 물안개로 지척이 잘 분간되지 않는 무율(霧律)에 찾아가 혼자로 서서 낭인처럼 스적스적 걸어보는 것은 열기로 벌겋게 가열된 일상을 차가운 바람으로 한번쯤 식혀 주는 구실을 할 수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2.  성황산을 향해 떠나던 날 아침엔,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비림(碑林)에 내리는 겨울비를 보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융릉(隆陵)에 닿은 것은 정오가 지나서였다. 처음에는 현륭원(縣隆園)이었다가 1899년에는 융릉(隆陵)으로 추봉된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원침(園寢).
 
겨울비가 내리는 율릉 근처에는 인적이 없었다. 겨울날에 누가 와서 능침을 보고자 할 것인가. 보는 사람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화산(花山)의 원침은 처음에는 영우원(永祐園)이라 했고 또 그 위치도 화산이 아닌 양주 배봉산에 있었다. 이 융능의 주인인 사도세자는 1735년 영빈 이씨와 영조의 사이에서 태어나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뒤를 이어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그 세수를 자연스럽게 누리지 못하고 비운에 목숨을 잃은 한이 많은 왕자이다.
 
효장세자 견(絹)이 영조 즉위 5년인 1726년 11월, 불과 열 살의 소년으로 요절하고 난 후 영조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영조는 40이 넘어서야 왕자를 얻었다. 이 왕자가 항(恒)이다. 왕자의 자는 윤관(允寬)이요, 호는 의제(毅斎)였다. 늦게 얻은 왕자이기 때문에 태어난 지 1년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의제는 10세에 당시 영의정이었던 홍봉한(洪鳳漢)의 딸 홍씨와 결혼했다. 그녀가 바로 혜경궁 홍씨이다.
 
왕세자로 책봉되면서 이름을 사도세자(思悼世子)라고 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당쟁에 말려들어 뒤주 속에서 목숨을 잃은 비운의 세자가 되었다.
 
이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세자책봉이 되고 영조가 죽고 난 뒤 홍국영의 힘을 입어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정조이다. 정조가 즉위하게 되자 박명원(朴明源)이 상소를 올려 영우원을 손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수원 화산에 길지를 잡고 원침을 현융원이라고 하고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했다.
 
정조는 효심이 지극한 왕이었다. 정조는 틈틈이 장헌세자의 능침이 있는 화산에 이르러 아버지의 명복을 빌었다. 어느날 성황산 기슭에 있는 갈양사에 들러 한 스님이 부모은경을 강의하는 강설을 들었다. 그리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정조는 화산 현융원 근처에 있는 이 절을 크게 중수하여 현융원의 원리(願利)로 삼고자 했다. 정조는 1790년 보경당 사일(寶鏡堂 獅馹)스님을 팔도도화주(八道道化主)로 삼고 성월당 철학(城月堂 哲學)스님을 부화주(副化主)로 삼아 팔도 관민의 시전 8만7천냥을 거두어 대웅전을 크게 짓고 대소 요사를 정비했다.
 
정조는 친히 봉불기복게(奉佛祈福偈)를 내리고, 단원 김홍도로 하여 불화를 그리게 했다. 상량문(上樑文)은 채제공(蔡濟恭)이 썼다. 낙성식날 밤 정조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등천하는 꿈을 꾸었다. 정조는 장헌세자의 원찰인 이 절 이름을 용주사(龍珠寺)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현융원의 원찰로 중창된 절이 바로 성황산의 용주사이다. 2백여년 전인 정조 14년, 1790년의 일이다. 갈양사(葛陽寺)가 용주사로 바뀐 것이다.

3.  융능에서 발길을 돌려 성황산의 용주사 경내로 들어섰다. 겨울비에 함초롬히 젖은 용주사는 특이한 정취를 안고 있었다. 경내에는 하얀 잔설이 여기저기 뭉쳐 있었다. 매표소에서 바라다 보이는 전각들은 흩어지는 운무 속으로 농담이 짙은 한 폭의 동양화와 같았다.
 
 천보루(天寶樓)앞에 서 있는 석탑은 기복사로 되기 전인 고려때의 석탑 같았다. 이 절의 창건 연대는 미상이지만 고려 광종때 혜거국사(惠居國師)와 지광선사(智光禪師)가 머물던 곳이라고 한다. 간단한 기록이다. 석탑은 아마 그 때의 유물인 듯 했다.
 
 ‘지차문래 막존지해(到此門來 莫存知解)’하고 음각된 화강암이 불숙 얼굴을 디민다. 이곳이 선문임을 은연중에 강조한다. 중앙선원(中央禪院)을 개원하면서 아마 이 도량에 들어서는 사람은 부질없이 지혜 따위를 가지고 덤벼들지 말라는 뜻으로 돌에다 그런 글귀를 새겨놓은 모양이다. 아무리 막존지해(莫存知解)라고 해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은 비정한 부정(夫情)이다.
 
  아들을 죽인 아비.
 그것은 아비를 죽인 아들보다 더욱 비정하다. 그것은 인륜에서 벗어난 패륜이다. 아비가 얼마나 우매하면 간신이나 처첩이나 화완 옹주 따위 아녀자들의 농간에 놀아나서 다음 대의 보위를 이어나갈 세자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말인가. 참으로 비정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의 우리 주변에서도 죄 없이 모함에 빠져 고통을 겪는 사람이 많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란 그런 것인가. 눈이 밝거나 지혜가 있거나 숙지(熟知)를 지니고 있는 사람보
다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떼를 지어 들고 일어나 세상을 혼돈으로 몰아 넣는다. 역사는 그래서 아이러니이다.
 
 아비의 비정이 아니었더라면 정조가 그만한 효심을 지닐 리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이처럼 장엄한 용주사가 들어설 리도 없긴 없다. 참으로 장엄하다. 거대한 요사와 고루 누각, 대웅전도 웅장하다. 삼성각(三聖閣), 효성전(孝聖殿), 지장각(地藏閣), 종각(鐘閣), 선원(禪院), 요사(寮舍) 등이 모두 은성하다.
 
초창은 신라 문성왕 6년이라고 하며 명거스님이 갈양사라고 했다 한다. 그러나 지금 있는 건물들은 2백여년 남짓 되는 연륜에 눌려있는 건물이다. 이 절을 부모은중경 도량이라고 해서 효사상과 깊은 연관을 짓는 것은 다 그만한 까닭이 있어서이다.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침을 화산에 옮기고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의 은혜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에 대해 설법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8도 통찰사라는 직책을 하사, 대가람 증축에 나섰기 때문에 효의 도량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조의 효심과 부모은중경과 보경스님의 설법이 서로 인연으로 만나 이 도량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효의 도량이라고 하는 것이다.
 
 융능과 용주사가 있기 때문에 정조가 이 화성의 화산을 자주 찾아 왔고 정조의 거듭되는 행차로 지지대도 생기고 수원성도 크게 가꾸어졌다.
 
용주사에는 그래서 은중경을 새긴 목판, 동판, 석판이 오늘에도 단정하게 보존되어 온다. 목판과 석판에 새긴 글씨는 채제공(蔡濟恭)의 글씨이다. 당대의 명필이라고 한다.다생부모십종대은도(多生父母十種大恩圖)까지 동판에 새겼다고 한다. 이 모든 것들이 귀중한 문화재가 되었다.

4.  용주사는 1911년 조선총독부의 사법(寺法)에 의해 31본산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895년 도성출입이 열리고 난 후, 불교는 오랜 기간의 칩거에서 벗어나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다가 1904년을 전후해서 변화되기 시작한 국내외의 거센 격랑에 휩쓸려 모처럼 맞이하게 된 자주적 행보에 영향을 받게 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강화조약을 맺고 5년 후인 1910년 보호조약을 체결, 우리는 일본에 합방되고 만다. 따라서 1911년은 일제가 본격적인 침탈의 발톱을 세우게 되는 해이다.
 
일제는 사사 관리법(寺社管理法)을 제정하여 31본산을 두고 총독이 직접 본산 주지를 임명한다. 강대연(姜大蓮)스님은 이때 본산인 용주사의 초대 주지가 되었다. 또 전국 5규정소의 하나가 되어 승풍을 규정하기도 했다. 본산인 용주사는 수원, 안성, 죽산, 남양, 용인, 고양, 시흥군 등지에 있는 48개 사찰을 관할했다.
 
1945년까지 31본산의 하나로 지내오다가 1955년에 이르러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본사가 되었다. 이는 1954년 일어난 불교정화운동의 여파로 이룩된 새로운 종단체제정립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었다. 이때는 수원 안양 2시와 화성, 시흥, 평택, 안성, 용인, 이천, 여천 등 7개군의 60여 사찰을 관할했다.
 
용주사는 1965년을 기점으로 하여 새로운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새로운 주지로 김관응(金觀應)스님이 부임하면서 학인들을 모아 강원을 열고 부족한 인재의 육성에 솔선하면서 사찰의 면모를 일신해 나갔다.
 
김석우(金石牛)스님의 뒤를 이은 성희변(成喜變)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동국역경원역장을 열었다.희섭스님에 이어 김도광(金導光)스님이 잠시 주지로 있다가 당대의 고승인 정전강(鄭田崗)스님이 주지로 부임했다. 전강스님은 용주사에 중앙선원을 개설하고 많은 학자들을 모아 선수(禪修)의 길을 열었다.
 
전강스님은 8․15광복에서 6․25전란으로 이어지는 전환기에도 선수행에 전력하여 학자들을 모아 길을 열어줄만한 정신적 능력을 지니고 있는 실질적인 고승이었다. 전강스님의 뒤를 이어 송담(松潭)스님이 주지로 부임, 노사(老師)의 유지를 이어 선원을 이끌었다. 10년간을 묵언으로 일관하며 공부에 전념했던 송담스님은 전강스님의 수제자였다. 송담스님의 뒤를 이어 정무(正無)스님이 주지를 맡으면서 용주사는 많은 변모를 가져왔다.
 
여러 가지로 포교사업을 펴고 불사도 일으켰다. 부모은중경탑을 건립하고 수원지역의 포교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정무스님의 뒤를 이어 7년 전에 정대(正大)스님이 8대 주지로 부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대스님이 주지로 부임, 용주사는 새로운 도약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기미가 도량에서 역력히 느껴졌다.
 
사원은 기원보다는 말씀의 도량이요, 수행의 도량이다.말씀은 부처님의 말씀을 밝게 해석하여 중생들에게 주는 정신적인 은전이요, 수행은 부처님의 법을 이어나가는 제자들이 안으로 안으로 정신을 승화시켜 나가는 향상일로의 과정이다. 마침 성도절을 앞둔 날이라서 용주사의 경내에는 오가는 신도들의 발길이 분주했다. 돌아오는 길에 기차문래 막존지해(到此門來 莫存知解)라는 글을 다시 한번 음미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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