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찰(마곡사,보경사,관음사,화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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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찰(마곡사,보경사,관음사,화음사)

마이템플 0 3180

태화산 마곡사

태화산의 명당지

  훈풍과 함께 여린 나뭇잎새가 바람결에 나부끼며 초여름을 알리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나뭇잎은 짙푸른 두터운 녹엽으로 바뀌었고 바람은 한 점 없이 눅눅한 공기만 흐르는 성하가 되었다. 무더운 시간을 피하여 태화산을 볼 생각으로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지만 결과는 한낮에야 마곡에 닿게 되었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공주행을 타고, 한참 도시 모양을 새롭게 추스르고 있는 공주시 외각에 닿기는 12시.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약 24km 떨어진 태화산 마곡사에 당도하기는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였다. 무려 5시간이 넘게 걸린 셈이다.
 
산구(山口)에 들어서고 보니 사람의 물결은 도심과 다를게 없었다. 사람이 붐비지 않는 밥집을 찾아들어 산채 비빔밥을 주문하고, 창밖으로 눈길을 주니 하동들이 쪽빛 청수가 넘실거리는 조그만 소(沼)에서 물장구를 치며 물놀이에 정신이 없다.
 
 푸른 숲이 뒤에 병풍처럼 둘러있어서인지, 계곡을 흐르는 물은 그야말로 쪽빛의 녹수였다. 차령산맥의 한 지맥으로 천안지방의 경덕산(慶德山)으로부터 길게 뻗어내려온 오지답다는 느낌이 그 물빛에서 더욱 역력하게 들었다. 극성스러운 사람들의 손길과 숨결에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것 엇이 모두가 무너져나가고 있는 판국에도, 이처럼 고운 물빛을 지닌 고장이 우리의 산하에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이 대견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산채비빔밥으로 점심을 늦게 때우고 푸른 물길을 따라 들어가니 참으로 경승(景勝)이랄 수밖에 없는 물과 숲이 그림처럼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맑고 푸른 물 속은 어항을 들여다 보듯이 속속들이 모두 내다보였으며, 물길을 따라 유유히 미끄러지듯 유영을 즐기는 물고기 떼들은 손상되지 않은 원형의 자연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했다. 곁을 지나는 사람들도 보이는 물고기들을 보면서 영탄을 금치 못했다.
 
 산세가 장려하거나 그렇게 고산(高山)은 아님에도 깊고 깊은 오지처럼 느껴지는 것은 길게 뻗어내려온 무성산(武城山)에 있다. 그것은 마곡사의 배산이 해발 614m에 지나지 않은 점으로 더욱 확실해진다. 남쪽으로 흐르던 물길은 동쪽으로 휘어져서 이내 서쪽으로 거슬러 오르고, 물길이 흐르면서 이루어낸 분지와 같은 평탄지에는 천년의 수림과 어우러진 가람이 웅자를 드러냈다.

대가람의 현장

  마곡사(摩谷寺)는 충남 공주군 사곡면 운암리 567번지 태화산 동쪽 기슭에 앉아 있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지금의 공주시에서 약 24km 상거한 곳에 있다. 비기(秘記)에 의하면 이름 높은 명당으로서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산곡을 흘러온 시냇물이 산의 표고에 비해 수량이 많으며, 물의 흐름새가 태극형 이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승지임을 실감나게 한다.
 
산지에 자리 잡은 가람이지만 표고가 150m 밖에 되지 않은 산암내의 평지인데다가 산곡에서 흘러내린 물길이 서쪽에서 시작해서 동쪽으로 흘러와서는 가람이 잇는 곳을 휘어감고 돌아 다시 남쪽으로 빠지고 있으며, 약간 높은 안산(案山)이 배산(背山)을 들여다 볼 수 없이 막고 있어서 다시 없는 길지(吉地)에 마곡(摩谷)이 있음이 분명하다.
 
이 곳의 오른편에는 군왕대와 왼편의 구릉이 막고 있고, 도량의 북서쪽으로 흐르는 시내를 따라 진입로가 트여 있다. 온양에서 16km, 공주에서 24km, 그리고 사곡(寺谷)에서는 8km 상거한 곳인데, 교통이 불편하여 한 때는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았다. 그로 인해서 같은 본사급인 수덕사에 비해 여러 측면에서 귀가 빠지는 구면을 보였으나 지금은 공주에서 시내버스가 40분마다 드나들 정도로 교통이 좋아졌다.
 
가람이 앉아 있는 지대는 동서가 250m, 남북이 400m로, 8천여평에 가까운 분지이며, 기이한 것은 흘러온 물길이 동서로 한 중앙을 관류하여 사역(寺域)의 부지를 남북으로 갈라 놓고 있는 점이다.
 
중앙을 흐르는 계류(溪流)를 중심으로 해서 북쪽에 해당되는 넓은 지역에 대웅보전과 대광보전, 5층석탑 등이 정남향으로 앉아 있고 전각과 탑을 꿰뚫는 중심선상에서 동편으로 심검당을 비롯한 요사가 있으며, 서편으로는 응진전과 종무소 건물이 위치해 있다. 중심을 흐르는 계류에는 그림같은 다리가 걸려 있으며, 시내를 건넌 남쪽에는 해탈문과 천왕문이 있고, 천왕문 서편으로 약간 돋우어진 지대에 영산전과 홍성루, 매회당, 수선사 등 요사가 있다. 명부전 뒤편 등성이에 국사당이 있다. 큰 절 뜰에서 보면 계류 건너에 있는 원당이나 요사는 일군의 별원(別院)같은 느낌을 준다.
 
마곡사 건물배치는 여느 가람 배치와는 다르다. 마곡사의 연혁을 보면 30여동의 당우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각들로 가득했을 터전은 이제는 드넓은 뜨락으로만 남아 있다. 번성을 이루었던 당시의 가람배치와도 차이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과 같은 가람배치가 임진왜란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해 본다.
 
마곡사는 산내 암자로는 영은암, 은적암, 대원암, 백련암, 청련암, 토굴암, 부옹암, 북가섭암 등이 있다.  이 골짜기에 들어오는 길은 서북에서 유구(維鳩)를 향하여 오다가 호계(虎溪)에서 들어오는 길과 온양에서 유구읍을 경유 포장도로를 따라 들어오는 길이 있다.
 
옥오재(玉吾齋) 송상기(宋相琦)가 쓴 기록을 보면 ‘절은 고개마루 아래에 있었으며 십여리 길가에 푸른 냇물과 흰바위가 있어 저절로 눈이 트였다’고 되어 있다. 마곡사의 사지(寺地) 일대를 휘감고 흐르는 냇물과 주변의 산에 울창한 수림, 그리고 여기 저기에서 꽃 피어난 산 벚나무와 녹음이 선경을 이루고 있음을 지적함일 것이다.

마곡사의 개창과 특수성

  마곡사는 선덕여왕 9년(640년),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국내에 7대 사찰을 지을 때 통도사, 월정사와 함게 창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창건년대가 그렇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통일신라 문성왕 때 보조선사가 개창했다는 설도 있기 때문이다. 고려 명종 때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서 중건되었다는 설을 중시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태화산 마곡사사적입안(泰華山 摩谷寺事蹟立案)」에 보면 당나라 정관(貞觀) 17년 자장율사가 당에 수학하고 돌아와 여러 곳에 불법을 홍포하고자 할 때 창건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절 이름을 마곡사라고 한 것도 보철화상(寶徹和尙)이 전도득법(傳道得法)한 후에 그의 율(律)을 배우고자 하여 모여든 사람들이 삼대와 같이 이 골짜기를 빽빽하게 메웠는데, 그 사람들의 모습이 마(摩)와 같았다고 하여 마곡사라고 했다고 것이다.
 
「연기약초(緣起略抄)」에는 신라 문성왕 2년 보조국사 체징(體澄)이 당나라에 건너가 선지식을 두루 돌아보고 귀국하여 교화사업에 힘을 쏟던 그 해에 이 절을 개산했고, 또 사명도 보조선사가 당에서 애법(愛法)한 보철선사의 호가 마곡인데 그의 법연(法緣)을 기리고자 마곡사라 했다는 것이다.
 
「사적입안(事蹟立案)」의 자장 청건설의 시기는 삼국이 통일되기 이전에 신라와 백제가 국경분쟁이 빈번하던 시기인 반면에 643년, 자장이 분황사에 머물면서 통도사와 오대산의 적멸보궁과 월정사를 창건할 시기이다.
 
「연기약초(緣起略抄)의 보조선사는 본래 태진(態津, 지금의 공주읍) 출신으로 후일에 가지산 보림사를 중창하여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가지산맥(迦智山脈)의 개조(開祖)가 된 승려이다.
 
이후 신라 문성왕 9년(847), 범일국사(梵日國師)가 당우를 확장했고 헌강왕 3년(877)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다시 중수하여 도량을 일신했다고 한다. 그 후 나말(羅末)과 여초(麗初)의 수십년간 다시 티락하였다 한다. 고려에 들어 불일(佛日) 보조국사(普照國師)를 맞이하여 패찰을 중수하고 제자 수우(守愚)와 함께 불사를 진행했다.
 
그 당시에는 많은 무리의 도적들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조에 들어서도 헌종(1465~1487)년간에 세조가 이 곳에 들려 영산전의 액호를 써주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맞아 전국이 초토화되고 많은 사찰들이 불에 타 그 흔적마저 사라진 당시에 비추어 보면, 확실한 기록이 보존될 까닭이 없다.
 
양대 병란 후로 60여년간 도량은 황폐해졌고, 1650년에 공주 목사로 부임한 감사 이태연(李泰淵)에 의해 자신의 월봉을 모아 불사를 일으켰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때에서야 승려들이 모여 절의 모습을 일으키고자 애를 썼다고 한다. 이 때에 불사에 주력한 승려가 각순지원(覺淳智元) 등이며 마곡사의 중흥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1782년, 마곡사에 큰 불이 일어나 대법당을 위시하여 5백여칸의 대소 건물이 불탔다. 현재 남아 있는 대웅전, 대광보전, 영산전, 흥성루, 심검당, 해탈문 등은 건륭(乾隆, 1736~1795), 가경(嘉慶, 1796~1820), 도광(道光, 1821~1850), 함례(咸禮, 1851~861)년간에 중수되었거나 개수된 건물이다.
 
  국사당에는 개창주 자장을 위시하여 불일 보조국사, 범일, 도선국사 등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으며, 영자전(影子殿)에는 지눌(智訥)을 비롯하여 휴정태능(休靜太能), 가휘(可煇), 각순(覺淳)등 마곡사에 주석했거나 중창을 담당했던 고승들의 영정이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후기로 들면서 불교는 더욱 쇠퇴해지고, 일제침략기간 중 어려워진 사원경제로 인하여 주거하는 승려 수도 줄고 건물도 퇴락하여 지금의 도량에는 19동의 전각이 남아 있다. 그런데다 최근에 이 곳을 지키는 승려들이 중창에 손을 쓰지 않아 더욱 황폐한 모습을 띄게 되었다.
 
마곡사는 자장이 창건했고 보희선사가 다시 조성했으며 범일이 3차로 건립에 힘을 썼고, 도선이 조성했으며 각순과 여러 승려들이 힘을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고려시대의 지눌의 중창 사실을 빼놓음이 의아스럽다.
 
 최근 백범 김구선생이 명성황후 시해범인 중 한 사람인 쯔찌다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갇혔다가 1898년 탈옥하여 마곡사에 들어와 은신하기도 하였다. 마곡사의 뜰에는 김구 주석을 기리는 비가 서 있고 그가 심었다는 향나무 한 그루도 있다.
 
지난해 마곡사 주지로 부임한 능엄스님은 33여억원이 소요되는 마곡사 중창불사 계획을 세우고 심검당, 요사채, 강당, 종루, 누각, 교량 등을 신축하고자 진력하고 있다.
 
전국 25개 교구본사 중에서 가장 퇴락된 모습으로 남아 있는 마곡사. 전임자들이야 그들대로 고충이 있어서 이와 같은 모습으로 지내왔겠지만, 대웅보전에 깔린 자리가 썩고 닳아서 흩어지고, 심검당은 손만 대면 주저앉을 것 같은 퇴락한 모습을 볼 때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새로 부임한 능엄스님이 벌써 몇몇 전각의 기둥을 갈고 번와를 하고 용마루를 바꾸어 뒤늦게나마 일신하려는 불사를 일으킴은 마곡사로 해서는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연산 보경사

12폭포 속 보경사

  지자요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 했다. 산수를 즐길 줄 알면 지자도 될 수 있고 인자도 될 수 있단 얘기다. 지혜와 덕을 갖춘다는 것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높은 경지이기에 우리의 조상들은 산수를 즐겨 찾고 가까이함으로 해서 그 모습과 성품을 닮아가려 했다.
 
경북 포항시에서 동해남부선 국도를 따라 북으로 70여리 올라가면 고찰 해동 보경사(寶鏡寺)가 12폭포의 장관 속에 포근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고, 그 속에서 지혜와 덕망을 갖추고자 하는 인간의 여망과 노력은 오랜 세월을 통해 전해져 오고 있다.
 
 6월의 태양이 뿜어내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인해 눈부신 가로수가 동해 국도변에 도열해 있고 그 속을 지나 도착한 보경사의 매표소 앞 일주문은 여느 고찰과는 다른 시골집 싸리문을 기억나게 한다.
 
웅려(雄麗)한 종남산(終南山)을 등에 업고 좌우로 빼어난 내연산 연봉(內延山 連峰)에 둘러싸여 12폭포의 맑은 물을 쏟아내리는 계곡 속에 자리한 보경사는 그윽한 계곡만큼 오랜 세월을 지내오며 수많은 얘깃거리를 남겨 놓았다.
 
 이 절의 주봉(主峰)을 종남산이라 함은 중국 성서성 장안의 안산(案山)인 종남산과 같다는 고전에 의한 것이며 여지승람(與知勝覽)에는 내영산(內迎山)이라 하였는데 이조말에 내연산(內延山)으로 바뀌었다. 또한 이 산의 정상에는 세 개의 바위가 있는데 사람의 손가락으로는 움직이나 양손으로는 움직여지지 않는 기암(奇岩)이라고 한다.

8면보경을 묻다

  보경사의 연기설화에 의하면 신라 제26대 진평왕 25년(서기 602년)에 일찍이 진(陳)나라에 들어가 유학을 하고 돌아온 지명법사가 왕께 아뢰기를 “동해안 영산에서 명당을 찾아 소승이 진나라에서 유학시 한 도인에게 전수한 팔면보경(八面寶鏡)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동해로 침입을 하는 왜구를 막고 이웃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하게 될 것입니다”하고는 이 곳 내연산 아래 못을 메우고 팔면경을 그 속에 묻고 금당을 세워 창건하고 보경사라 칭했다.
 
도인으로부터 비전한 팔만보경이란 보경사 금당탑기에 의하면, 한(漢) 영평 10년에 서역의 범승인 마등과 법안 두 스님이 불경과 불상을 받들고 중국에 올 적에 12면원경(十二面圓鏡)과 8면원경(八面圓鏡)을 가지고 왔다.
 
12면경은 중국 낙양옹문(洛陽雍門) 밖에 묻고 절을 세우니 그때 백마에 경과 거울을 싣고 왔다 하여 백마사라 칭하고 팔면경은 두 법사의 제자 일조(日照)에게 맡기면서 부탁하기를 “동쪽나라 조선 해 뜨는 곳에 종남산이 있으며 그 산 아래 백 척 깊은 못이 있으니 그 곳은 동국의 명당이다. 그 못을 메우고 그 속에 이 거울을 묻고 법당을 세우면 만세천하에 무너지지 않는 곳이다”라 전하고 일조법사로부터 5백년을 비전(秘傳)되어 오다가 신라의 지명법사(智明法師)에게 불법과 아울러 전하여졌다.
 
  이 일로 해서 우리 8역(域=道) 가문의 안정을 꾀하고자 하였다 한다. 또한 금당 앞 5층탑을 신라 제33대 성덕왕 22년 도인 각인(覺仁)과 문원(文遠)이 서로 의논하여 절이 있는데 탑이 없을 수 없
다 하고 발원하여 시추를 얻어 세웠다 한다.
 
그 후 신라 제35대 경덕왕 4년에 철민화상에 의해 한 차례의 중창이 있었고 고려 제23대 고종 원년에 대선사 승형 곧 원진국사(圓眞國師)로 하여금 보경사에 주지일을 맡게 했으며, 그 때에 당우가 퇴락한 것을 보고 승방 4동과 정문 1칸 등을 일시 중창하고 종․경․법고 등의 도구도 완비하였다.
 
원진국사 이래로 계속하여 퇴락과 중창․중수를 거듭해오다 최근의 보경사 모습을 갖추게 된 때는 1977년 채벽암화상에 의해서이다. 벽암스님은 부임한 이듬해에 퇴락한 적광전(寂光殿) 삼존불상의 금의(金衣)를 일신 개금불사를 하고, 조사전 앞에 보물 제252호의 원진국사비가 천년 세월 풍상에 시달려 마모되고 퇴락한 것을 도 및 군에서 보조비를 받아 비각 2칸을 건립하는 등 보
수와 사천왕상조성의 불사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람의 향기

  보경사에는 적광전 대웅전을 위시하여 14동의 건물이 있다. 적광전은 불교에서 최고의 이상을 표시한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고 좌우보처에 문수, 보현보살을 모셔 삼존불을 봉안한 성전이다.
 
 이렇듯 삼존불을 모시는 것은 대개 화엄종에 속해있던 사찰을 의미한다.  금당기(金堂記)에 ‘남악문인 철민이 보경사를 중창하였다’고 한 것의 남악은 의상대사의 화엄종이 신라말기에 남악․북악 두 파로 갈리었는데 그 남악을 가리킨 것으로 볼 때 또한 그러하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도 해월(海月)․계영(桂影)․오어암(敖魚岩)․동봉(東峰) 등 큰 강사가 배출되어 경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적광선 뒤편으로는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다. 화엄종에서는 비로전을 모시면 대웅전을 따로이 모시지 않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여러 종파가 한데 통합되자 비로전․대웅전․영산전․나한전 등을 종합하여 봉안하게 되었다.
 
 현존의 이 법당은 숙종 3년에 중창하였다는 기록만 있을 뿐 매우 장중하고 간결한 조선 중엽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고 그 외 영상전과 팔상전, 원진전 등의 건물이 있다.  고려중엽 불교계의 거성이며 보경사의 중창조로서 그 높은 선풍을 드날리고 도덕이 당시의 사표가 된 원진국사의 비가 대웅전 후원 영산전 앞에 보물 제252호로 지정되어 엄연한 모습으로 서있다. 이 비는 고려 통의대부 추밀원 부승선 이공로가 그 글을 찬했다.
 
 비둔에 의하면 국사의 속성은 신씨(申氏)이며 이름은 숭형, 자는 영회로 상락군 산양현 사람으로 고려 제19대 명종원년에 탄생되었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유학을 전승해 왔으며 세살 때 고아가 된 승형은 숙부의 손에 의해 길러졌다. 국사가 일곱 살되던 해 청도 운문사의 연실선사에게 위탁되어 글공부를 하게 되었을 때 남다른 총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던 그가 출가를 한 것은 13세가 되던 해 희양산 봉악사에서다. 스님의 도행은 일찍이 그 명망을 드날렸다.
 
스님이 27세 되던 해 보제선사의 담선법회(선승들의 참선공부를 시험보는 법회)에 나아가던 중 스승의 부음을 듣고 가던 길을 되돌아 스승의 장례를 치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종은 평소 형승 스님의 도행을 흠모해 오던 터라 선․교종의 감독기관인 우승록사를 불러 “형승스님을 합격자로 등록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교를 내릴 정도였다.
 
 그 해 가을 개경 광명사에서 벌어진 선불장에 나아가 장원으로 발탁된 스님은 이 일이 오히려 수행함에 있어 커다란 장애라 여기고 걸망을 짊어지고 운수납자의 길을 떠났다. 그래서 찾은 사람이 조계산 송강사의 방장으로 있던 보조국사 지눌이었다. 승형스님은 지눌스님을 참견하고 ‘법(法)과 색(色)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걸 깨닫고 지눌의 문하가 되어 조계선풍의 후손이 된다. 그리고 명산고찰을 순례하며 수도에 힘쓰던 중 금강산 유점사를 거쳐 이 곳 보경사의 소임을 맡았다.
 
이규보의 이상국집에 보면, 국사가 보경사에 계실 때 고증왕이 왕사로 봉하려 대신을 보내는 등 간청을 했으나 굳이 사양하고 표문을 다섯 번이나 올렸다. 또한 수 백명의 도둑이 운문사를 점거하고 있을 때 단신으로 법회를 열어 「육조단경」으로 그들을 교화시켰으며 청도 칠장사에서 가뭄으로 모든 우물이 고갈 되었을 때 자각(慈覺)선사의 법문으로 해갈시키고 팔공산 염불암에서 선정으로 가뭄을 풀었다고 한다. 이렇듯 도력과 덕행이 높은 승형스님은 고종 8년 염불암에서 입적하였는데, 고종은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하여 시호를 「원진(圓眞)」이라 하고 국사의 칭호를 내렸다.
 
 이외에도 보경사에는 원각조사와 오암대사 등 많은 스님들이 수도처로 머물렀다. 그 중 오암스님은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보경사에서 머리를 깎은 오암스님은 계영강백에게 구족계를 받아 서산대사의 9세손이 되었다. 스님은 대단히 총명하고 글공부하는데 있어 재주가 남달라 당시 억불숭유로 인해 승려를 하대시하는 유생들을 글로써 설복시킨 일이 여러차례나 있어 그의 도덕과 교화가 경상좌도 일대를 풍미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8면보경의 창건비화와 더불은 원진국사와 원각조사 오암스님의 이야기는 보경사의 그윽한 향기를 전해주고 있다.

새로운 도약

  내연산 계곡의 길이는 무려 30리나 된다. 그 계곡을 타고 오르면 오를 수록 그윽함이 더해가고 바위구멍과 반석에서 흘러내려 폭포와 농소를 이룬 절승에다 그 사이 좌우로 치솟은 비하대며 학소대의 기상이 오랜세월을 두고 이 곳을 거쳐간 사람들의 호흡을 담고 있다. 이런 속에 자리한 보경사의 이끼낀 기와쪽 하나 깨어진 돌탑 하나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얼마간의 정적이 머문 대웅전 뜰에 서서 간간히 들리는 풍경소리며 향내음을 가슴깊이 받아 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곳에서 원진국사도 만나고 오암대사의 기지도 배워야 하며 서역에서부터 8면보경을 가져다 이 곳에 묻고 불당을 세운 그 뜻을 새겨보아야 한다.
 
보경사는 근래의 잠시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몇 년을 흘러 보냈다. 이제 새로 부임한 진현스님에 의해 새출발을 다짐하고있다. 진현스님이 이 곳에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동안 퇴락된 담장도 쌓고 종무소의 건립도 추진 중이다. 특히 보경사에 보관하고 있는 약 62점의 보물과 유물들을 정리하여 관람할 수 있도록 유물관의 건립도 계획하고 있다. 발길을 돌려 하산하는 길은 또 한번의 해후를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는 동해바다의 소금기 섞인 바람이 아득한 옛날로의 향수를 불러 일으켜 뭇사람들의 발길을 잠시 더 잡아둔다.

 
한라산 관음사

  제주도!
  전통적으로 불자의 신심이 강하고 뿌리가 깊은 곳이다. 이곳 사람들은 한반도의 불교가 첫 발걸음을 옮겨온 곳이 제주도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른바 지금으로부터 2천5백여년전 부처님의 16나한 가운데 여섯 번째 나한인 발다라존자가 제주도에 와서 불법을 처음 전했다는 설이다. 이같은 한국불교의 초전법륜지로 알려진 곳이 한반도 남단 최대의 섬, 제주이다.
 
  열성적인 불자의 섬, 제주도 불교의 총본산은 관음사(觀音寺). 산하에 21개의 말사를 보유하고 있는 조계종 제23교구 본사로 제주 볼교의 산실이자 중심적 역할을 하는 사찰이라 할 수 있다.
 
  제주도가 전통적으로 불교의 융성지이자 국내에서도 가장 유서가 깊었던 곳이었다는 증거들은 제주 곳곳의 지명에서도 쉽게 나타나 있다. 우선 현재의 한라산이란 지명은 나한산이었다는 설이 대표적인 예. 부처님의 제자인 「발다라존자」란 아라한이 고대에 첫 발을 제주에 들여 놓은 점을 따서 지금의 한라산, 나한산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사라봉이며, 가실, 오라동, 아라동, 마라도, 가파도, 스모르 등이 현재도 쓰이고 있는데 이는 모두 붉적 지명이라는 것이다.
 
가싱른 부처님이 설법하신 녹야원이란 뜻이며 오라는 넓은 들, 마라도는 하얀꽃 화한, 가파도는 푸픈연꽃, 스모르는 극락정토를 가리키는 말로써 모두가 불교적 의미와 정신을 담고 있는 지명들이다. 이렇듯 오랜 전통과 역사, 그리고 지명들 속에서 불교와 대단히 밀접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는 제주도 불교는 한반도 남단의 섬이란 특수지형 속에서 자체적인 발달을 해온 것이다.
 
이런 가운데 관음사는 고래로부터 한국불교의 전초기지로서 대내외적인 역할을 하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관음사는 1905년 안 봉려관이란 비구니 스님에 의해 중창되었다. 안 봉려관 비구니스님은 전라도 남원군 대흥사에서 비구니계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관음사를 중창한 안 봉려관은 당초 심신이 두터운 여신도였었다가 불가에 귀의했다.
 
 그러나 전통의 한국불교 초전법륜지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제주불교의 중심지 관음사의 역사와 연혁은 육지의 사찰처럼 자세히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는 우선 제주 불교의 독
특한 발전사에서 기인한 때문이다. 제주불교는 육지에서와 같이 본사 중심 또는 공찰 중심으로 발전해 오지는 않았다고 알려진다. 제주도라는 독특한 지형적, 기후적 영향을 받아 애초부터 제주사람들의 토속적 신앙과 병행하면서 발전해 왔다.
 
 따라서 불교는 제주에서 지역민의 정서와 풍습에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발전되어 온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이른바 민중불교의 요소를 오래전부터 내포해 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제주 불교가 관음사라는 조계종 23교구 본사를 중심으로 당초부터 발전했다기 보다는 개별사찰의 각각 활성화된 포교를 바탕으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관음사가 제주도 안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상징적 기능은 막대하다. 개별 사찰위주의 신행활동이 뿌리조직처럼 뻗어 있으나 이 모든 불교활동을 관음사라는 본사가 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음사는 육지 사찰본사와는 또 다른 신앙적 존경과 영역을 갖고 있다. 제주도 내의 주요 사찰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승려들이 관음사에 속해 있었거나 깊은 인연을 맺어오고 잇는 점을 보아도 그렇다.
 
 제주 관음사의 중창불사는 육지의 타본사에 비해 비교적 척박한 역사를 갖고 있으나 그 이전의 시대를 거슬러 가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조선시대의 불교탄압 정책으로 인해 가까운 근세사 속에서의 제주 불교 역사가 크게 쇠퇴하긴 했으나 고려시대 불교융성기 등에서 제주불교의 활동성 등은 상당했었다.
 
 역사적 자료 가운데 제주 관음사는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12개의 사찰 중 마지막 순서로 나타나 있다. 이와함께 제주 불교의 전통, 역사와 함께 해온 관음사는 또한 불교역사만이 아닌 사회적 상황과 시대상을 반영하는 증거로서 함께 아픔 및 민족의 애환을 간직해 온다. 이는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인한 불교의 수난 그리고 제주 역사 속의 4․3사건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로인해 제주도 내 사찰과 승려들은 이 곳 제주도 사람들의 각 생활 속에서 활동하고 있다.
 
4․3사건의 이후 상황만 보아도 그렇다. 이들 제주도 사람들로서는 거의 대부분이 관련된 민족적 아픔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불교는 이들의 가족적, 지역적, 민족적 아픔을 위로하고 함께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주도 불교는 관음사를 정점으로 비록 과거 불교의 융성기처럼 번창해 있지는 않지만 주민과 지역사회속에 여전히 뿌리를 내리고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제주도가 불교 이외의 타종교의 확산을 거의 받아들이고 있는 않은 상황만 보아도 그렇다.
 
제주 관음사는 최근 재도약의 전기를 맞고 있다. 불교계의 원로인 석주스님이 관음사 주지로 취임한 이후 제주불교와 관음사의 발전을 위한 새 모습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 한라산 중턱에 우뚝 자리잡고 있는 관음사는 본사의 기능과 함께 제주시내에 포교당을 갖고 있다. 이와함께 제주불교의 활성화
를 위한 다양한 계획들이 최근의 관음사 스님들에 의해 준비되고 있다. 총무스님은 우선 관음사 안에 명부전을 건립해 지역민과 더욱 밀접한 관계형성 속에서 포교의 활성화를 기할 것이라고 말한다.
 
관음사 대웅전 옆에 조성될 명부전은 약 10년 전부터 계획을 갖고 있었던 불사다. 명부전은 제주도민의 특수한 상황에서 기획된 불사이기도 하다. 4․3사건을 기화로 제주도민의 다수가 같은 날 희생자의 제사를 지내고 있는 상황에서 불교가 희생자의 영가천도제를 한 곳에서 치루어 낼 수 있는 계기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토속적 신앙이 여전히 내재하고 있는 특수한 제주도 상황에서 불교가 지역민들을 불교 속으로 더욱 가깝게 하고 부처님 법속에 포용할 수 있도록 건립되는 것이 명부전이다. 관음사측은 명부전 안에 납골당을 설치해 불교적 차원의 장례의식을 이끌어 내는 데도 기여할 생각이다. 명부전이 완공되면 제주에서 불교가 지역민을 위한 대규모 영가천도의 식을 한 날, 한 장소에서 행할 수 있고 희생자의 위령을 위해서도 큰 몫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관음사측도 이 명부전 불사가 지역민과 지역사회에 불교의 신심을 더욱 강화하고 제주불교의 새모습을 창조할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와함께 관음사는 제주시내 중앙동에 위치한 포교당 건물(약4백70평)등 사찰소유 재산 및 운영 등을 승가와 재가신도가 공동운영 한다는 방안도 갖고 있다. 이같은 방안은 사찰 재정의 활용과 운영을 종래의 승가 자체의 결정방식에서 벗어나 재가신도와 함께 협의하고 운영함으로써 신도의 적극 동참 및 신뢰를 기한다는 것이다.
 
관음사의 이런 방안은 현행 사찰 대부분의 경직된 사고에서 크게 진전된 것으로 시법적인 사례가 되고 있다는 평이다. 향후 관음사는 이같은 사부대중과의 공동논의 운영을 통해 더욱 활발한 불사와 포교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 화엄사

산악신앙과 문수보살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 노고단 서쪽에 자리한 화엄사. 
제19교구본사 화엄사가 자리한 지리산은 영 ․ 호남의 분수령으로 지덕을 갖춘 영산이다. 백두산의 큰 줄기가 이 곳 남해에 이르러 끝마쳤다 해서 과거엔 두류산(頭流山)이라 불렸었다. 천왕봉과 중봉을 서쪽에 두고 동쪽으로 흘러오다가 덕평봉 반야봉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지리산의 산록은 기암과 벽송으로 일대장관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동서를 가로 지르는 백여리의 산록이 유연하면서도 웅장함을 잃지 않는 계곡을 감싸고 있어 예부터 신라 오악중 남악에 속해 있었으며, 삼신산(三神山)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웅장하고 수려한 산세와 더불어 사시사철 조화로운 변화는 우리의 조상들로 하여금 신령스러운 산으로 믿어져 왔던 것이다.
 
「택리지(擇里誌)」에 기술된 지리산은 이런 모습이다.
세상에는 금강산을 봉래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方丈)이라 하고, 한라산을 영주라고 하는데 이른바 삼신산(三神山)이다. 「지지(地誌)」에는 지리산을 태을성신(太乙星神)이 사는 곳이며 여러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했다. 또한 땅이 남해에 가깝고 기후가 온난하여 산 속에 대나무가 많고 사람이 없어도 감과 밤이 저절로 열리고 떨어진다고 해서 온 산이 풍년과 흉년을 모르고 지내므로 부산(富山)이라 불렸다. 이렇듯 오랜 종교인 불교가 본디 우리 민족이 갖고 있던 산악신앙과 습합되어져 이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된 터를 제공하는데 지리산도 한 몫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산에 거주한다는 신선들은 보살의 명칭으로 바뀌어 나갔다. 금강산에는 법기(法起)보살이, 오대산에는 문수보살이 현신했다 함이 그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이 땅에 본시 불보살의 주처였다는 불국토 신앙으로까지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지리산은 문수보살의 도량이다. 그리하여 고기(古記)에는 문수사리의 리를 따서 지리산(地利山)이라고 표기하기도 했던 것이다.
 
지리산의 주봉 노고단은 길상봉이라고도 불렸었다. 이는 고려 건국의 왕건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이와 관련된 일화를 이렇게 적고 있다. ‘지리산의 주신(主神)은 선도성모(仙桃聖母)이며 또한 노고단(老姑壇)이라고도 불린다. 우리 태조가 늘 이 곳에서 기도하여 지리산 신의 감응을 받았으므로 남악가(南嶽訶)를 남악소의방(南嶽所義坊)에 옮겨 세웠다’고 하여 지금도 그 유기(遺基)가 남아있다.
 
이 천연의 승경 지리산 주변에는 화엄사 뿐 아니라 수많은 명찰과 고적이 산재해 있다. 하동 진주에 이르는 남쪽에는 천은사, 쌍계사, 연곡사가 있고 동으로는 법계사, 대원사, 북에는 실상사가 자리하고 있다.

악기조사의 개창 

  풍요롭고 신령스러운 땅 지리산에 세워진 화엄사는 범승(梵僧)인 연기조사에 의해 개산된 것으로 그 연원은 까마득하게 멀기만 하다.  화엄사의 일주문을 경계로 하여 가름된 시간의 흐름은 완급을
달리한 듯 하여 시간이란 단위는 고정된 절대치를 갖고 있진 않은 듯 느껴진다.
 
 현대 물리학이 하나 둘 벗겨나가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이렇듯 화엄사의 일주문에 서서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됨은 세속과 달리 시간의 완급을 조절했던 유명 무명의 스님들 그리고 불교를 좋아하고 자연의 법칙에 순응했던 선조들만의 공감대에서 형성된 것일게다.
 
이것은 미물들이 느끼는 시간의 개념과 영장인 사람이 느끼는 시간의 개념이 다르듯 세속과 지리산 화엄사가 갖고 있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게 느껴진 것과는 같은 이치일게다. 화엄사의 개창을 맡았던 범승 연기조사의 탑이 아직도 도량을 수호하고 있고 네 마리의 사자로 하여금 무명을 밝히게한 석등, 각황전의 고색창연합이 그러한 분위기에 젖게 한다.
 
화엄사의 초창과 창건주에 관해 판본사적에는 신라 진흥왕 5년 인도승 연기조사가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여지승람에는 시대는 분명치 않으나 연기(煙氣)라는 스님이 세웠다고만 하고 있다. 「구예속지(求禮續誌)」에는 좀더 부연해서 진흥왕 4년에 연기조사가 세웠으며 백제법왕이 이 곳 화엄사에서 3천 승려를 입주(入住)케 했다고 하여 당시의 모습을 적고 있다. 
 
 연기스님은 인도스님으로 구전에는 연마(燕馬)를 타고 우리나라에 왔다고 해서 연기(燕起)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이 곳 지리산에 와서 주석하면서 화엄학을 널리 현양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창건한 사찰은 화엄사 외에도 흥덕 연기사, 나주 운흥사, 천은사, 연곡사, 곤양 서봉사, 산청 대원사 등이 남아 있다. 처음 연기조사에 의해 초창된 화엄사의 규모는 해회당(海會堂)과 대웅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을 갖춘 소규모의 절이었다.

화엄불국세계

  그보다 근 1세기 후 의상대사가 이 곳에 오면서 화엄사는 대도량으로서의 기틀을 잡게 되었다. 문무왕 10년 의상스님은 화엄십찰을 전교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화엄사를 중수하였다. 「봉성지(鳳城誌)」에는 의상스님의 왕명을 받고 삼층의 장육전(丈六殿)을 건립하고 그 둘레를 석각(石刻) 화엄경으로 둘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석경(石經)에 새겨진 「정원본사십화엄(貞元本四十華嚴)」은 장육전의 건립보다 1세기나 후에 번역된 것으로 앞뒤가 맞질 않는다.
 
근세 화엄사의 대강백이었던 진진응(陳震應) 스님은 이 석경의 건립은 신라 말엽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추측하고, 아울러 이 석경의 돌이 모두 경주에서 온 옥석이라는 설에 대해서도 그것은 모두 지리산에서 볼 수 있는 납석인데, 임란의 병화로 불타면서 기와색깔이 부옇게 변색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의상의 중건 이후, 다시 화엄사가 확장된 것은 경덕왕(景德王) 때의 일이다. 경덕왕은 칙령으로 화엄사를 중건, 새롭게 모습을 꾸며 가람 8원(阮) 81암(庵)의 대규모의 사찰로서 소위 화엄불 국세계를 이루었다고 한다.
 
개산 이후 최고의 융성기를 누리게 된 것은 신라말엽 화엄사를 중수한 공덕주 도선(道詵)에 의해서였다. 15세기 때 화엄사에서 출가한 스님은 스무살 때 혜철대사의 강하(講下)에서 불법의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헌강왕은 스님의 이러한 도력을 흠모하여 궁궐로 모셔 법문을 듣기까지 하였다. 왕실의 배려로 도선스님은 화엄사를 확장하고 총림대도량(叢林大道場)을 열어 화엄사의 중흥조로 일컬어졌다.
 
도선스님은 흔히 풍수지리나 참위설 등의 대가로 알려져있다. 스님의 도참설은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에 인용될 만큼 인정을 받았고 이러한 영향력은 도선이 세상을 뜬 후에도 고려태조는 그의 유촉을 따라 오백선찰을 건립하고 삼천팔백의 절을 세울 것을 명령하였다. 이 때 화엄사는 도선스님의 주처로 제일 먼저 중수되는 왕실의 비호를 받았다.
 
세종 6년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된 화엄사도 임란의 병화를 피해갈 순 없었지만 배불의 와중 속에서도 화엄사는 고승들이 주관하는 법석의 요람지였다. 설응, 승인, 부휴, 중관, 무염같은 대선사와 법사가 이 곳에서 법회를 마련했다는 기록은 화엄의 교지를 선양했던 화엄사의 역할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또한 화엄사 승군이 임란에서 세운 혁혁한 공로를 기술하고 있는데, 난이 평정된 후 선조가 그 활약을 치하하기 위해 어필서책을 하사하는 등 화엄사 구복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화엄사의 1차 복구작업은 인조 8년 벽암대사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 후 계파성능 선사는 벽암의 숙원이었던 장육전을 중건하였고 삼존불 사보살상을 완성하여 일주일에 걸쳐 성대한 경찬대법회를 열었다. 숙종은 장육전을 각황전이라 친히 사액하고 사격을 한 층 더 높여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大伽藍)」이라 하였다.
 
원융무애한 세계
  화엄의 철학은 기존의 노장사상과 그밖의 다른 전통적 사고 방식을 원만하게 회통적(會通的)으로 이해하는데 매우 관용적인 동양인의 심성을 함양하였고, 동양의 지혜로운 선각자들을 세계에서도 가장 뛰어난 정신문명의 창조자로 만드는 밑거름 구실을 했다. 이러한 화엄의 세계를 구현해 나가고자 한 화엄사의 고원하고 광대한 이념은 오랜 세월의 연륜을 쌓으며 무수한 고승대덕의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나타난 결실이다.   불전 가운데 가장 방대한 화엄경을 돌에 새겨 각황전 네벽에 쌓아올린 지극한 정성으로 화엄의 세계를 천착해 나간 고승들에 의해 화엄사는 이름 그대로 화엄의 근본 도량이 되었던 것이다. 
 
  창건 초기 때부터 갖춘 요사 겸 설법전이었던 해회당(海會堂)의 모습이 이를 잘 대변하고 있다.  산문 입구의 부도전에서부터 약 백미터쯤 오르면 화엄사 일주문이 나타나고 일주문을 지나고 나면 문수․보현의 동자상을 안치한 금강문에 닿는 다. 그 뒤로 목각 사천왕상을 안치한 제 3문 천왕문을 갖춰 여느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불이문(不二門)을 이룩하고 있다.
 
중생구제를 위해 그야말로 널리 화엄의 세계를 펼쳤던 보제루를 지나고 나면 비로소 화엄사의 위용이 시야에 꽉 들어찬다.   종교의 의미는 어찌보면 신성함과 금기사항을 얼마나 잘 유지해 나가는가 하는데 그 생명력이 부여된다고 봤을 때 과거불당과 법당은 엄연히 구분했던 것에 지금의 불당은 그만큼 격이 낮아져 있다고 봐야한다.
 
화엄사의 각황전, 대웅전, 원통전 등이 불당중에 물론 국보로 지정되어 불자 아닌 사람들에게까지 관심의 대상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문화재 이전에 불당이라는 위치가 더 중요하다. 정문을 통해 안을 기웃기웃하는 모습이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관광객들에게 참배하는 예절을 가르치는 안내자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사찰을 순례하면서 느낀 점이다.
 
 삼여래 사보살상을 안치한 정면 7간 측면 5간의 2층 팔작지붕 각황전의 웅대함과 짝을 이룬 석등. 각황전의 서남방쪽으로 108계단을 오르면 형태가 특이한 3층 석탑과 석등이 있다. 사전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창건주 연기조사의 효성을 추앙하여 건립한 일종의 불사리 공양탑이다.
 
사방에 사자 네 마리가 석탑을 바치고 있고 그 중앙에 승상(僧像)이 합장하여 머리로써 탑을 이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연기조사의 어머니인 비구니의 모습이라 하며, 그 바로 앞에는 석등이 있는데, 석등 아래 무릎을 꿇고 있는 승상은 연기조사라 한다. 그 모습이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님을 느끼게 해준다. 화엄의 한 구절을 떠올려본다. ‘일념으로 보기를 제불이 세간에 출현 하지만 사실은 생긴 일 없음을 알면 그 사람이야말로 큰 사람이라 일컬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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