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神心銘) 강설 (51-60)
마이템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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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5 11:53
51) 그 까닭을 없이하면 견주어 비할 바가 없음이라. 泯其所以하야
不可方比라.
(민기소이) (불가방비)
(민기소이) (불가방비)
그러면 그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러나 그 이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부사의 해탈경계(不思議解脫境界)이기 때문에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고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비교해서 이렇다 저렇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52) 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나니. 止動無動이요 動止無止니
(지동무동) (동지무지)
움직임과 그침은 상대법으로서 여기서는 먼저 이 두 상대법을 서로 긍정적 다음에 두
법을 당부하였습니다(照而遮). 그치면서 움직인다(止而動)함은, 그침과 움직임이 서로 긍정하면서 두 법이 융통자재하게 살아나는 동시에 움직임이
없음(無動)을 말하였고, 움직이면서 그친다(動而止)함은, 움직임과 그침이 서로 긍정하면서 두 법이 상통(相通)하는 동시에 그침이 없음(無止)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움직임과 그침의 양변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다시 두 법을 긍정하여 서로 융통자재하게 쓸 수 있는 중도정의(中道正義)를 여기서는 볼 수 있는 것입니다.그치면서 움직임(止動)과 움직이면서 그침(動止)은 두 법이 서로 비춰서(雙照) 살아남(常 照)을 말하고, 움직임이 없고(無動) 그침이 없다(無止)함은 두 법을 함께 막아(雙遮)없애 버림으로써(常寂) 비치면서 항상 고요하고(照而常寂)고요하면서 항상 비치는 (寂而常照)중도 법계의 이치를 그대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먼저 비춰서 막고(照而遮) 뒤에 막아서 비춘(遮而照)다는 순서만 달리하였을 뿐, 막음과 비춤을 함께 한(遮照同時)중도정의는 다름이 없습니다. 결국 움직임은 그침에 즉(卽)한 움직이므로 움직임이 없는 것이며, 그침은 움직임에 즉(卽)한 그침이므로 그침이 없어서, 움직임과 그침이 함께 융통자재하면서 동시에 두 상대법이 없어짐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움직임은 그침 가운데 움직임이며(靜中動), 그침은 움직임 가운데 그침이어서(動中靜) 움직임과 그침의 두 상대법이 함께 없어지면서 함께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53)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거니 하나인들 어찌 있을 건가. 兩旣不成이라 一何有爾아
(양기불성) (일하유이)
움직임과 그침이 상대법이기 때문에 움직임과 그침을 모두 버리면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않는데 하나가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까지도
없어져야 둘이 없어진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둘이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인들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54) 구경하고 궁극하여서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음이요. 究竟窮極하야 不存軌則이요.
(구경궁극) (부존궤칙)
양변을 완전히 떠나서 중도를 성취하면 거기서는 중도라 할 것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구경하고 궁극한 법으로서 어떠한 정해진
법칙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칙이 없다해서 단멸에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으며, 모날 수도 있고 둥글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전한 진여대용이 자유자재하고 호호탕탕하여 법을 마음대로 쓰는 입장에서 하는 말입니다.
55) 마음에 계합하여 평등케 되어 짓고 짓는 바가 함께 쉬도다. 契心平等하야 所作이 俱息이로다.
(계심평등) (소작) (구식)
내 마음이 일체에 평등하면 조금도 차별 망견을 찾아볼 수 없고 여여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산이 물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물이
산 위로 솟아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산은 산 그대로 높고, 물은 물 그대로 깊은데, 그 가운데 일체가 평등하고 여여부동함을 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짓고 짓는 바가 함께 쉰다’고 표현하고 있으니 바로 일체 변견을 다 쉬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56) 여우 같은 의심이 다하여 맑아지면 바른 믿음이 고루 발라지며 狐疑가 盡淨하면 正信이 調直이라
(호의) (진정) (정신) (조직)
자기의 일체 변견과 망견을 다 버리면 의심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믿음이 화살같이 곧게 서버렸다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正信)이란 신ㆍ해ㆍ오ㆍ증(信解悟證)의 전체를 통한 데서 나오는 믿음이며 처음 발심하는 신심(信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경을
성취하면 바른 믿음이라 하든 정각(正覺)이라 하든 여기서는 뭐라해도 상관없으니 이것이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은 수행의 지위가 낮고 정각은 수행의 지위가 높은 것으로 생각할는지 모르겠으나 근본은 바로 성취한 사람을 믿음이라, 각(覺)이라, 부처라, 중생이라, 조사라, 무어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실제에 있어서는 변견을 여의고 중도를 바로 성취했느냐 못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지, 이름은 무엇이라 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57) 일체가 머물지 아니하여 기억할 아무 것도 없도다. 一切不留하야 無可記憶이로다.
(일체불유) (무가기억)
객관적으로 일체가 머물지 못한다거나 주관적으로 일체를 머물게 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떤 머물 것이 있고 머물지 못할 것이 있는 것처럼
됩니다. 때문에 여기에는 능ㆍ소(能所)가 붙이므로 바른 해석이 되질 않습니다.
여기서는 바른 믿음이 곧고 발라서 진여자성이 현전해 있기 때문에 일체가 머물지 못하고 또한 일체를 머물게 하지 않는다는 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을 기억할래야 할 것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부처도 조사도 찾아볼 수 없는데 무슨 기억을 할 수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58) 허허로이 밝아 스스로 비추나니 애써 마음 쓸 일 아니로다. 虛明自照하야 不勞心力이라.
(허명자조)
(불로심력)
허(虛)란 일체가 끊어진 쌍차(雙遮)를 의미하고, 명(明)이란 일체를 비추어 다 살아나는 것으로서 즉 쌍조(雙照)를 말합니다.
허(虛)가 명(明)을 비치고 명(明)이 허(虛)를 비춰서 부정과 긍정이 동시(遮照同時)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본래 갖추어진 자성의 묘한 작용이므로 마음의 힘으로서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59) 생각으로 헤아릴 곳 아님이라 의식과 망정으로 측량키 어렵도다. 非思量處라 識情으론 難測이로다.
(비사량처)
(식정) (난측)
대도는 사량(思量)으로는 알 수 없고 깨쳐야만 안다는 것입니다. 보통 중생의 사량은 거친 사량(思量)이라 하고, 성인의 사량은 제팔
아뢰야식의 미세사량(微細思量)이라 하는데 거친 사량은 그만두고, 미세사량으로도 대도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십지ㆍ등각의 성인도 구경각을 성취한 묘각만이 그러한 무상대도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바로 진여법계라 한다는 것입니다.
60) 바로 깨친 진여의 법계에는 남도 없고 나도 없음이라眞如法界엔 無他無自라.
(진여법계) (무타무자)
여기서부터는 「신심명(身心銘)」의 총결산입니다.모든 병폐를 털어 버리면 진여법계가 현전한다는 것입니다. 진여법계란 일심법계(一心法界)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을 견성이라고 합니다. 그 진여법계의 내용은 남도 없고 나도 없어서 모든 상대 곧 일체를 초월하여 양변을 완전히 떠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현실이란 상대로 되어 있는데, 그 현상계를 해탈하여 진여법계ㆍ일심법계인 자성을 보게 되면, 남도 없고 나도 없는 절대 경지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상대법이 끊어진 쌍차(雙遮)의 경계이며 진여법계ㆍ일심법계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