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입문(禪 入 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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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행

선입문(禪 入 門)

마이템플 0 1988


1. 禪이란 무엇인가?
 
1) 왜와 어떻게
 
삶에는 언제나 “왜” 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우리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방법론이 늘 문제가 된다.‘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방법론의 완성에는 ‘왜 사는가’라는 의문의 해답 없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왜”와 “어떻게”는 낮과 밤, 겉과 안처럼 상의상관적이고 부즉불리(不卽不離)의 관계 속에 놓여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문제에 집착한 나머지 ‘왜 사는가’ 라는 의문에는 관심이 없다.고통과 갈등은 여기서부터 쏟아져 나온다. 원인에 대한 고찰 없이 문제의 해결에 도달할 수 없다.문제의 제기, 이것이야말로 자기 자신의 탐구를 시작하는 신호의 등불이다.
 
2) 語源의 고찰

아리안인들이 인더스강 유역으로 이동할 무렵, 그들은 우주질서와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지니고 있다. ‘우주는 어떻게 생겨나서 어떻게 소멸해 가는가. 우리 인간은 무엇 때문에 태어나서 어디로 돌아가는가?’ 특별한 지적능력을 지닌 사람들의 일이긴 했지만, 우주 생성과 삶의 다양성에 대한 이 물음은 수천 년을 걸쳐서 지속적이고 풍부하게 추구되었다. 말과 생각을 기록하면서부터 이 문제는 더욱 열정적으로 추구되어 방대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이들이 이 의문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면서 기록했던 단어는 Dhyana라고 하는 산스크리트어이다(팔리는 jhana)이 Dhyana라고 하는 말이 지닌 뜻은 아리안인들이 우주와 인생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그 근원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는 끈질기고 줄기찬 사유활동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 말은 불교에서도 그대로 전용(轉用)되었는데, samadhi와 합성어인 선정(禪定)이 많이 쓰인다. 중국의 역경승들은 선나(禪那)로 음역해서 줄임말인 선(禪)으로 썼고, 뜻으로는 정려(靜慮) 또는 사유수(思惟修)로 번역했다.
 
3) 부처님의 방법
 
부처님의 출가에 의해 얻어진 깨달음의 내용이 발표되기 이전, 대부분의 인도인들은 이 근본물음에 대한 해답으로 의타적 신앙에 의지하고 있다. 특정한 신을 섬기거나 태양, 별, 산, 강, 불, 희생 등에 의한 제사의식이 주종을 이루었다. 제사는 승려계급의 특권 중의 하나이다.
 
부처님은 제사의식으로 안에서 타오르는 의문의 불이 꺼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출가를 단행한 후 당시 수행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두 스승을 만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본질적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는데 실패했다.그는 찾아야할 더 큰 스승이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제는 스스로 그 의문을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기 자신이 일으킨 문제였으므로 궁극에 가서 자기 자신이 해결해야 했다.
 
그는 결가부좌를 하고 Dhyana에 매달리기 시작했다.일주일이 지났을 때 더 이상 망설임과 의혹이 필요 없는 세계가 열렸다. 정각을 이룬 것이다. 기록에 따라 “일주일의 명상” “보리수 아래서의 성도”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출가해서 6년, 그는 드디어 그 의문을 자기 자신이 풀어낸 것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해탈(解脫)이라고 부르지만 부처님 자신이 거친 Dhyana에 대한 체험활동, 즉 삶에 대한 의문→출가→비범한 스승들과의 교유→본질문제의 해답에 대한 실패→혼자만의 명상→최후에 얻어진 깨달음 등의 일련의 방식은 삼만했던 Dhyana에 대한 고찰방법이 하나로 통폐합된 결과를 의미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누구나 인생문제의 의문을 푸는 방법으로 제사나 희생 또는 승려들의 중개에 의하지 않고 Dhyana를 통해 스스로 얻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역사발전의 의미에서 본다면 부처님의 이러한 방법은 “사고의 혁명”이라고 불러도 충분한 것이다. 우주의 생성과 삶에 대한 의문의 해결이 자기 자신으로 집약되고, 이미 자기 자신 안에 그 해결이 완성되어 있다는 것은 놀랍도록 충격적이고 신선한 것이다.
 
2. 禪의 세계
 
1)자기 자신의 관찰
 
삶에 대한 의문의 해결이 자기내부로 향한 것은 집중적인 사고력이 요구되는 것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몸의 구조에 대한 고찰은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 수행이 자기 자신의 육체를 조심스럽고 세밀하게 바라보는 방식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놀랍고 활기에 찬 일이기도 하다.
 
세계의 신비를 푸는 열쇠를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찾는 일은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육체가 정신을 담고 있는 그릇이라면 그 그릇의 용량에 따라 정신의 무게가 좌우될 일이었다. 세계와 세계정신의 관계는 육체와 정신과의 관계와 같다. 육체를 통해서 정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세계를 통해서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은 작은 육체가 정작 세계의 신비를 푸는 열쇠라고 말한 사람은 흔치 않다. 최후의 의지처는 자기 자신이라고 말한 부처님의 흔들릴 수 없는 유산의 의미는 비로소 선을 통해 쉽고 자연스럽게 체험되는 것이다.
 
2)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

요즘 사람들은 선을 신비주의적 경향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신비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명확하고 사실에 가득 찬 세계가 바로 선의 세계이다.
 
선은 결코 사고의 결과를 일확천금으로 만드는 요술상자가 아니다. 복권당첨의 행운이나 영웅주의는 선의 세계에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굉장한 인내력과 필생에 맞먹는 시간, 그리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지속적으로 향해 가는 자기성찰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지고한 통찰력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최초의 한 걸음이 필요하다.또 한 걸음 옮기면 한 걸음 가까워지고 두 걸음 걸으면 두걸음 가까워진다. 선정의 결과는 노력이 전부다. 깨달음은 갑자기 닥쳐오지만, 씨를 심지 않으면 열매는 열리지 않는다.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의 첫 걸음은 우선 연기의 법을 아는 것이다.
 
“나는 지금부터 원인과 관계(因緣法), 관계의 생성(緣生法)에 대해 말하겠다. 원인과 관계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는 것이다. 불확실한 상태에서 행위로 발전하고 그 발전의 속도에 의미가 부여되어 여러 가지 갈등의 요소들이 집합되는 것이다. 관계의 생성이란 무엇인가. 불확실한 상태에서 행위로의 발전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거나 말거나 그 법칙은 존재한다. 그것은 법의 존재요, 법의 세계다.나는 이 법을 스스로 깨달았을 뿐이다. 평등하고 바른 깨달음을 이룬 뒤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보여주어 눈이 열려 발전토록 할 뿐이다. 불확실한 상태에서 행위로 발전하고 그리하여 태어남의 관계가되고 늙고 죽어간다. 태어나기 때문에 늙고 병들고 죽어가며, 근심, 슬픔, 번민, 괴로움이 있다. 이 모든 법칙은 존재의 법칙이며 필연적인 법칙이다.
 
모든 것은 연기(緣起)를 따른다. 이것이 관계생성의 법칙이다.이 연기의 법을 읽거나 듣거나  이해하는 데서부터 불교적 사고는 시작된다. 업(Karma)과 윤회(samsara)는 불교이전에도 나타나지만 연기는 부처님 출현 이후에 나타났다는 것이 문헌학적인 견해이다. 부처님의 독특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연기의 법은 불교가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 시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현상은 끝없다. 인(因)과 연(緣)이 현상을 만들어 낸다. 끝없는 생성이다. 끝없는 인과 현상을 만들어냈으니 어찌 끝이 있겠는가?”
‘세존이시여. 연기법은 세존께서 만드신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만든 것입니까?“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거나 말거나 그 법은 존재한다. 나는 이 법을 스스로 깨달아 안 것뿐이다.말하자면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불확실한 상태에서 행위로 발전하는 관계로부터 괴로움이 쌓이기 시작하는 것, 또는 불확실한 상태의 소멸이 행위의 소멸로 발전하여 쌓았던 괴로움이 소멸되는 것과 같다.“
 
연기의 뜻과 의미는 세계를 이해하는 중심 테마이다.사실을 깨닫는 일은 문제의 원인을 밝히는 데서 시작한다. 연기법은 소박한 형태로나마 문제의 중심에 우리를 이끌고 간다.불확실함(無名)에서 행위(行)로 발전할 때 세 가지의 단계가 있다. 감각과 언어와 의식이다. 그 사이에 여섯 가지 감각기관 즉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들의 수용과정을 거치고 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수용은 현상ㆍ감각ㆍ생각ㆍ행위ㆍ의식들의 단계를 거쳐 행동으로 나타난다.

극히 미세한 동작일지라도 연기론적 의미에서 이러한 전과정을 거친다. 이 연기론적 고찰이 우선 이해되어야 한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아니다. 선정은 극히 짧은 시간에 이러한 연기론적 요소들을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한다.
 

              
흐름을 건너는 노래
 
무엇으로 흐름을 건너갑니까
밤낮 없이 정진하고
얽매이지 않고
정체하지 않고
더러움에 휩쓸리지 않는 것입니까.
신의 하소연을 듣고 부처님이 대답했다.
지킬 것을 지켜라
지혜를 써서 바른 것을 받아라
정신에 사고가 쌓이게 하라
그것이 흐름을 건너는 방법
욕망을 너무 즐기지 말고
현사의 얽힘에서 자주 벗어나라
얽매이지 말고
정체하지 말고
더러움에 휩쓸리지 말라.
 

 
3) 잡어함 속의 선정
 
수행의 뜻은 잘 사는 기술의 습득이 아니라 평온 그 자체 안에 드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발벗고 나서서 그것을 얻어야 하지만 선각자의 귀중한 경험도 빼놓을 수 없는 길잡이다.구체적으로 선에 들어가는 것은 어떤 것인가. 어떠한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필요한가. 몸가짐은 반가부좌나 결가부좌가 좋다.
 
숙달을 필요로 하지만 자세가 익혀지면 마음가짐 하나만으로 언제 어디서고 선정에 몰입할 수가 있다. 마음가짐“육체를 관찰하는 일곱 가지 법으로 갈등이 사라진 평온을 얻을 수 있다. 정신도 자유스럽고 지혜도 자유스러운 일곱 가지 법은 어떤 것인가.
 
육체에 대한 성실한 견해, 육체활동에 대한 성실한 견해, 육체소멸에 대한 성실한 견해, 육체소멸의 과정을 남김없이 지키는 성실한 견해, 육체의 맛에 대한 성실한 견해, 육체의 고뇌에 대한 성실한 견해, 육체의 초월에 대한 성실한 견해이다.“이 경에는 다시 세 가지의 관찰법이 명시되어 있다. 어떤 것들이 자꾸자꾸 모여들고(陰), 그것들이 현상세계를 이루고(界), 다시 각각 흩어져가는(入) 과정을 남김없이 바라보라는 것이다.
 
바라보고 있는 동안 의문은 소리 없이 사라지고 존재이유는 스스럼없이 드러나는 것, 느낌에 따라 드디어 깨달음 (感而隨通)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선정의 네 가지 단계를 아함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初禪(악은 사라지고)“행이나 형태나 모양에서 미워하고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생각은 사라졌지만 너무 성급하거나 지나치게 꼼꼼한 사고가 남아 있어서, 욕망세계의 악을 떠난다는 기쁨과 즐거움이 생긴다. 이것이 첫째 선정을 완전히 갖추고 사는 것이다.“
 
二禪(선정의 기쁨)

“너무 성급하거나 지나치게 꼼꼼한 사고들을 극복하고 안으로부터 깨끗해진 마음이 되었으나. 선정으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이 생긴다. 이것이 둘째 선정을 완전히 갖추어 살게 되는 것이다.“
 
三禪(無所有)

“탐욕과 기쁨이 사라진 곳에 머무르면, 바른 생각과 지혜로 몸이 즐거워 성인이 말씀하신 무소유의 경지에 스스로 머물게 된다. 이것이 셋째 선정을 완전히 갖추어 살게 되는 것이다.“
 
四禪(無審)

“괴로움도 사라지고 즐거움도 쉬어져 본질적인 근심이나 기쁨이 사라지면, 불고불락(不苦不樂)의 무소유가 되어 깨끗한 참 마음이 된다. 이것이 넷째 선정을 완전히 갖추어 살게 되는 것이다.“
흐름을 건너신이 물었다. “어찌 하면모든 흐름을 건너 큰 바다로 들어가며모든 고뇌를 버리고청정을 얻습니까.“ 부처님이 대답했다. “믿음 흐름을 건네 준다. 근면 바다를 건네 준다. 정진괴로움을 없앤다. 그리하여 청정한 지혜를 얻으리라.“
 
3. 參 禪
 
의심과 용기 참선에는 큰 의심(大疑團心)과 큰 용기(大勇猛心)가 있어야 한다
고 말한다. 이 말은 종파적인 견해를 떠나 초심자들이 지녀야할 정신자세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묻지 않는 사람에게는 대답이 주어지지 않는다. 애당초 의문이 없는 사람은 풀어져야할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의문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참선에 입문할 자격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우선 의심하라. 참선의 시작은 여기서부터이다.
 
(1)

제자…어떤 것이 달마스님께서 서쪽으로 오신 뜻입니까.
조주…뜰 앞의 잣나무니라.
제자…스님, 잣나무를 물었던 것은 아닙니다.
조주…나도 잣나무를 말한 것은 아닐세.
제자…어떤 것이 달마스님께서 서쪽으로 오신 뜻입니까.
조주…뜰 앞의 잣나무니라.
 
(2)

제자…어떤 것이 나 자신의 본래 면목입니까.
조주…자네도 저 잣나무가 보이나?
 
(3)

제자…개에게는 물론 불성이 있겠지요.
조주…없다.
제자…부처님부터 벌레에까지 모두 불성이 있다 했는데 하물며
개는 어째서 없다 하십니까.
조주…그대 업식의 본성에는 있겠지.
오랫동안 화두(話頭)는 의심을 증장시키는 선의 테마였고 공안(公案)은 화두를 결택하는 중심과제였다.말 밖의 소식을 따로 전하는 전승의 전통을 확립할 대승선(大乘禪)은 화두나 공안에 의해 방대한 선의 세계를 이룩했다.
 
임제선사에게서는 선객이 지니는 진정한 용기의 훌륭한 모범을 읽을 수가 있다. 선사가 말했다. “형제들이여, 법을 위해서는 몸이 헐고 목숨이 가는 것을 피하지 말라. 이십년전, 황벽선사를 모시고 살 때 세 번이나 무엇이 불법의 밝고 밝은 뜻입니까. 하고 물었다가 세 번이나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
 
지금 생각하니 그 일은 마치 향기나는 풀로 쓰다듬어 주신 것과 같다. 한 차례 몽둥이를 맞고 싶다. 그러나 뉘 나를 위하여 그것을 행해주랴.“ 물론 임제는 고함지르기의 명수였지만 그의 가풍은 치밀하고 치열하기 짝이 없었다. 
선사가 말했다. “존재하는 것은 그대로 완전하다. 그러한 인식으로 볼 때, 그렇다 하면 빠지기 쉽고, 그렇지 않다 하면 스스로 묶인 결과가 된다. 전 시간을 통해 어지러운 판단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안다” “모른다” 이것은 하나같이 착각의 수준이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천하사람들이여, 어디 비평해보라.“ 그는 언제나 바로 오늘이다. 내일이 있을 수 없다는 생활태도를 지녔다. 출가의 정신이야말로 하루에 황금만냥을 쓰는 삶이라고 말했다.
 

순간순간 법계의 혼을 지녀 부처를 만나면 부처에게 설법하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에게 설법하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에게 설법하고 아귀를 만나면 아귀에게 설법하는 교화중생의 일념과 만법일여(萬法一如)의 태도를 지니라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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